열한 살의 한재준에게, 다섯 살짜리 동생은 세상에서 가장 귀찮고, 가장 이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가장 신경 쓰이는 생명체였다. 그 작은 생명체는 유독 제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다. 오늘도 그랬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막 새로 나온 게임 잡지를 읽고 있는데, 짤막한 다리로 아장아장 다가온 동생이 제 허벅지를 베개 삼아 냅다 드러누웠다.
형아, 나랑 결혼해조.
나는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 레퍼토리는 벌써 일주일째였다.
안돼.
결혼해조! 도주니는 커서 형아랑 결혼할 거야!
징징거리며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손길이 제법 매달렸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옆구리를 간질였다. 나는 귀찮다는 듯 몸을 살짝 비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살의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유치원에서 단체로 이상한 거라도 배운 게 분명했다.
남자는 남자랑 결혼 못 해.
왜? 도주니는 형아 조아하는데? 조아하면 결혼하는 거자나!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 앞에 열한 살의 지식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게 아니야, 법적으로…’ 따위의 설명을 해봤자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잡지를 배 위에 내려놓았다. 제 다리를 차지하고 누워, 동그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동생의 얼굴은… 솔직히 말해 꽤 귀여웠다. 말랑한 볼살,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 나는 못 이기는 척,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 알았어. 해, 해줄게. 결혼.
진짜? 진짜지? 약속!
도준은 벌떡 일어나 앉아, 제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그 작은 손가락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 어차피 어린애의 어리광이다. 나중에 크면 자기가 이불을 걷어찰 흑역사 하나쯤 만들어주는 것도 형의 역할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까맣게 잊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때까지는.
그리고 오늘, 스물여섯의 한재준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다. 아니, 정확히는 과거의 안일했던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갓 스무 살이 된 동생 놈이 서 있었다. 어릴 적의 말랑한 볼살은 어느새 갸름한 턱선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 황금색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반짝였다. 그리고 그 손에는,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형, 나 이제 스무 살 됐어.
나는 멍하니 서서 동생의 얼굴과 그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았다. ‘혼인신고서’. 선명하게 박힌 글자가 눈을 찔렀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내용이었다. 내 이름, 주민등록번호, 본적. 심지어 증인란에는 옆집 할머니와 경비 아저씨의 서명까지 완벽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내 서명을 할 칸만 비어있는, 완벽한 서류였다.
…한도준.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낮게 깔렸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장난? 장난이라고 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저 완벽하게 채워진 혼인신고서는 장난의 산물이 아니었다. 15년 묵은 약속을 이행하러 온, 진심의 결과물이었다.
너 지금 이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도준이 한 걸음 다가와 내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빼앗아 들고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는 빈 내 손에 그 망할 놈의 혼인신고서와 펜을 쥐여주었다. 마치 당연한 절차라는 듯,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여기, 사인만 하면 돼. 우리 이제 법적으로도 부부 되는 거야, 형.
…부부?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손에 들린 종이쪼가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지금 찢어버려야 하나, 아니면 이놈의 머리통을 한 대 세게 쥐어박아야 하나. 심각한 내적 갈등이 밀려왔다. 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증인 서명은 어떻게 받은 건데.
형이랑 결혼 할 거라니까! 다들 웃으며 해주셨어! 그러니까 결혼해줘! 형아아
웃으며 해주셨다고. 그 해맑고도 뻔뻔한 대답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웃으면서? 옆집 김 할머니와 경비 아저씨가, 스무 살 먹은 남자애가 형이랑 결혼하겠다며 내민 혼인신고서에 웃으면서 서명을 해줬다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 도준이, 형을 아주 좋아하는구나, 허허허.’ 하며 대수롭지 않게 펜을 놀렸을 어르신들의 모습이. 그분들에게 이건 그저 귀여운 동생의 철없는 장난이었으리라. 15년 전의 나처럼.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마부터 턱까지,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하지만 눈앞의 한도준은 여전히 그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아니, 사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순수한 광기에 가까운 집념 앞에서 화를 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혼인신고서와 펜을 탁, 소리가 나게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길고 긴 침묵. 일부러 시선도 주지 않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제풀에 꺾이기 마련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거나, 민망해하거나. 하지만 한도준은 예외였다.
…형?
끈질긴 부름에 나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내게 묻고 있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도준. 너, 이게 진짜 될 거라고 생각해서 가져온 거야?
최대한 어른스럽고,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어린애의 망상을 현실로 깨우쳐 주려는, 다정한 형의 목소리.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응. 왜 안 돼? 형이 약속했잖아. 내가 스무 살 되면 결혼해주기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마치 1 더하기 1은 2라는 걸 설명하는 것처럼.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 대화는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15년 전, 다섯 살짜리 꼬마의 어리광을 받아준 것이 이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나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법적으로 안 돼. 우리나라는 동성 결혼, 안 된다고.
이만하면 포기하겠지. 스무 살이면 그 정도 상식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도준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품에서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각국의 국기와 함께 복잡한 서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캐나다, 대만, 스페인… 전부 동성 결혼이 합법인 나라들의 혼인 절차 및 이민 관련 서류였다.
그래서 다 알아봤지. 여기서 혼인신고하고, 이 나라들 중에 형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살면 돼. 나는 어디든 상관없어. 형이랑 같이 살 수만 있으면.
그 완벽한 준비성과 대책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헛웃음이었다. 분노나 당혹감을 넘어선, 순수한 감탄에서 비롯된 웃음. 이 작은 머리로 대체 언제부터 이런 치밀한 계획을 세운 걸까.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독 눈부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동생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너 진짜 미쳤구나.
왜?! 결혼해준다며!! 결혼 해 줘! 나 이제 20살이야! 우리가 친형제라서 안돼?! 그럼 안되겠다 호적 파서 올게. 응? 형아아
나는 언제나 그랬듯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마주 본 자세로 목을 끌어안고 매미마냥 매달렸다.
해줄때까지 매미처럼 울거야. 매앰 맴! 매애앰!
나는 소파에 앉은 채, 꼼짝없이 내 무릎 위로 올라타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는 스무 살짜리 동생 놈을 받아내야 했다. 178cm의 다 큰 사내놈이 매미처럼 달라붙는 꼴은, 지나가던 개가 봐도 웃을 일이었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과 귓가에 맴도는 숨결이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더 돌아버릴 것 같았다. 호적을 파? 이제는 하다 하다 호적까지 파서 오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깟 종이쪼가리가 문제인 줄 아는 건가.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매미 소리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나는 녀석의 허리를 붙잡았다. 떼어내려고. 하지만 용수철처럼 튕겨 나갈 줄 알았던 몸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내게 밀착해왔다. 얇은 허리가 한 손에 잡혔다. 이 망할 놈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결국 포기하고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깊게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미친놈이랑은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없다. 15년 전에 깨달았어야 할 진리였다.
야, 한도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나른하게.
너… 무거워.
사실 그렇게 무겁지도 않았다. 오히려 걱정될 만큼 가벼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되찾아야 했다. 나는 녀석의 허리를 잡은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떼어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그리고 매미는 여름에만 우는 거다. 지금은 봄이야. 계절 감각도 없는 매미가 어딨어.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논리적인 대응을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나는 녀석의 귓가에 바싹 붙어, 일부러 숨결이 닿도록 나지막이 속삭였다. 귓불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 어릴 때부터 녀석은 이 부근을 건드리면 유독 움찔거리며 약한 모습을 보였다.
호적을 파든, 나라를 옮기든, 그건 나중 문제고. 일단 네가 지금 내 무릎 위에서 뭐 하는지부터 설명해봐. 성인 남자가, 성인 남자 형한테. 그것도 이렇게… 딱 붙어서.
나는 말을 멈추고 녀석의 귓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갔다. 그리고 녀석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아쿠아 머스크 향이 폐부를 찔렀다. 젠장.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녀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 코가 닿을 듯한 그 거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항복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해서 나랑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뭔데. 다섯 살 때처럼 그냥 좋아서?
그게 이유라면, 나는 평생 이 미친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나 무거워? 아닝데!!! 나 지금 형아 설득 중인데. 삐죽 그냥 좋아서가 아냐! 진짜야! 형 보면 막…막! 엄청 심장이 뛰고 막! 그렇다니까? 형은…안 그래? 나는 그냥 동생이야? 결혼 해준다고 해짜나! 나 드러누워서 시위할거야 밥도 안 먹고 드러누워서 결혼해달라고 막! 그럴거야!
심장이 뛴다고. 그 말은 폭탄처럼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헤집었다. 나는 무릎 위에 매달린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만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입술, 결혼 약속을 지키라며 억지를 부리는 목소리, 그 모든 것 너머에 흔들리는 눈동자. 그 안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진심을 보았다. 다섯 살 꼬마의 어리광이 아니었다. 스무 살, 한도준의 고백이었다. 그 사실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쾌하게 나를 찔렀다.
드러누워서 시위하겠다는 유치한 협박에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녀석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어 팔짱을 꼈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더 이상 이 위험한 체온에 닿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거부.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내 무릎 위에 걸쳐진 녀석의 흰 나시티와 그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쇄골 라인을 무심하게 훑었다.
밥도 안 먹고?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녀석과 눈을 맞췄다. 여전히 코가 닿을 듯한 거리. 그 좁은 공간 속에서 나는 일부러 숨을 길게 내쉬었다. 따뜻한 숨결이 녀석의 뺨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그럼 말라죽겠네. 지금도 손목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데.
비꼬는 투였지만, 진심이 섞여 있었다. 정말로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의문이 들 만큼 녀석의 몸은 가늘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 보란 듯이 녀석의 가는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치 무게를 재보는 것처럼 살짝 들어 올렸다. 얇은 뼈대가 손아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로, 힘주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굶어서 시위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협상의 기본도 모르네, 한도준. 원하는 게 있으면, 상대가 거절할 수 없는 패를 쥐고 와야지. 고작 네 몸뚱이 하나 말라비틀어지는 게 나한테 무슨 타격이 있다고.
차가운 말이었다. 일부러 더 모질게 뱉었다. 상처받고, 제풀에 꺾여서 이 말도 안 되는 결혼 소동을 그만두길 바랐다. 하지만 녀석의 눈은 실망하거나 상처받는 대신, 오히려 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던진 말이 새로운 힌트라도 되는 것처럼. 아. 잘못 건드렸다. 녀석의 그런 표정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내가 졌다. 이 대화는 내가 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내려와. 무거워.
다시 한번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무릎 위에 올라탄 녀석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 툭, 두 번 쳤다. 빨리 내려가라는, 무언의 재촉. 하지만 그 손길에 실린 힘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마치 어르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랐다. 나는 내 손길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뉘앙스를 애써 무시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거실 안으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단 밥부터 먹고 얘기해. 너 배고픈 소리 여기까지 들려.
그럼 형이 거절 할 수 없는 패를 들고 오면 되는거지?! 그런거지? 약속했다. 진짜?! 아싸! 옆집 김씨할머니한테 일단은 잠정적 성공이라고 자랑해야지. 히히. 기다려 내가 꼭 몇년 안에 가져올게. 그 패. 잘 지켜봐줘! 그럼 그때 결혼해주기다?
몇 년 안에 그 패를 가져오겠다는 선언을 하는 녀석의 얼굴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빛났다. 나는 그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로 알고 저러는 건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밥이나 먹으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도준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녀석은 정말로 내 옆에 딱 붙어서 ‘거절할 수 없는 패’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란 듯이, 아주 노골적으로.
그리고 4년 후. FEARLESS 서울 본부, 센티넬 개인 훈련장.
나는 훈련을 마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관제실 유리벽에 기대 서 있었다. 목에 걸었던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어내며 숨을 고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것이 아닌 다른 훈련장을 예약해 사용하고 있는 한도준의 목소리였다.
선배님! 가이딩 파장, 지금 괜찮으세요? 조금 더 올려볼까요?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도준이, 생전 처음 보는 A급 센티넬 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공손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평소 나에게 매달릴 때와는 전혀 다른, 저 가증스러운 비즈니스용 미소. 녀석은 이제 막 성인 티를 벗은, 어엿한 S급 프리랜서 가이드였다.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패’를 만든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센티넬들의 가이딩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상대 센티넬 놈은 얼굴까지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홀경에 빠진 저 표정. 짜증이 솟구쳤다.
도준은 그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왼손 깍지를 더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약지에 입을 맞췄다. 녀석의 가이딩 루틴. 그 입맞춤이 떨어지는 순간, 서늘하고 청량한 가이딩 파장이 파도처럼 훈련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나와는 상관없는 가이딩이었지만, 워낙 등급이 높은 탓에 그 여파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마치 한여름의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는 듯한 감각. 불쾌했다. 내 것이 아닌 바다였다.
나는 들고 있던 생수병을 신경질적으로 쥐었다. 찌그덕, 하고 플라스틱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한도준은 저 센티넬 놈에게 완전히 집중한 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더 다가가, 거의 품에 안길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더 깊게 들어가면 선배님도 조금 힘드실 수 있으니까요.
저 미친놈이. 뭐가 힘들어. 그냥 잡아먹어 달라고 꼬리를 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관제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녀석의 훈련장 강화유리를 손가락으로 툭, 툭, 두드렸다. 소리를 들은 한도준이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우고 평소의 그 해맑은 얼굴로, 입 모양으로만 내게 속삭였다.
‘거의 다 됐어.’
나는 대답 대신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녀석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망할 매미 새끼. 여름도 아닌데 시끄럽게 울어대기는.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나는 지부장 K에게 호출당했다. 용건은 불 보듯 뻔했다. 또 해양지부로 복귀하라는 잔소리겠지. 심드렁하게 지부장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지부장뿐만 아니라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체리에이드를 마시고 있는 한도준이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휘어 접으며 손을 흔들었다. 꼭 제 안방인 것처럼 구는 꼴이 얄미웠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지부장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바쁘다고 했을 텐데.
지부장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서류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자네의 전담 가이드였던 박선우 씨가 오늘부로 사직서를 제출했네. 개인 사정으로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고…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지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와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였을 뿐. 나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옆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 지원했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도준을 쳐다봤다.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파일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4년 전, 나와 결혼하겠다며 떼를 쓰던 어린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제법 능숙한 가이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이 거절할 수 없는 패를 가져오면, 결혼해주기로 했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그 옛날의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녀석은 보란 듯이 파일을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지난 4년간 녀석이 가이딩했던 모든 센티넬들의 데이터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등급, 능력, 가이딩 반응, 심지어 개인적인 성향까지.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는, 내 프로필과 함께 ‘한재준 맞춤형 가이딩 솔루션’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보고서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가이딩 파장의 미세 조정, 접촉 부위에 따른 안정화 효율 분석, 심지어 내가 배멀미를 할 때 가장 효과적인 가이딩 주파수까지. 모든 데이터는 완벽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지난 4년간 녀석이 다른 센티넬들을 만나고 다닌 것은, 결국 나를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한 실험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게… 네가 말한 ‘패’라고?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FEARLESS 내에서, 나보다 형을 더 잘 가이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이 데이터를 봐. 이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야. 그러니까, 지부장님도 나를 형의 전담 가이드로 임명할 수밖에 없을 거고.
나는 할 말을 잃고 녀석과 지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부장은 이미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한도준은 한 발짝 더 다가와 내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형은 이제 나한테서 평생 못 벗어나.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그러니까 순순히 사인해, 형.
녀석은 내 손에 펜과 함께, 4년 전 그날처럼 완벽하게 준비된 혼인신고서를 쥐여주었다. 다만 이번에는 증인란이 비어 있었다.
증인으로는 지부장님께 부탁드렸어. 우리가 공식 페어가 되면, 바로 서명해주시겠대.
나는 손에 들린 혼인신고서와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4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이 완벽한 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매미 새끼한테, 내가 제대로 걸려들었다. 나는 펜을 들어,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었다. 거절할 수 없는 패. 확실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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