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2세의 첫 시험 성적
2026.04.14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나는 태블릿으로 들어온 해양지부의 분기별 보고서를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나른했고, 공기는 평화로웠다. 전장에서 수천 발의 포화를 지휘하던 해상제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사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내 바짓가랑이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는 작은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나와 당신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얼굴의 작은 아이, 한세아가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조그만 손에는 꾸깃꾸깃한 시험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빠, 싸인.

아이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시험지를 내밀었다. 나는 태블릿을 옆으로 내려놓고, 아이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시선이 종이의 맨 위, 붉은색 잉크로 선명하게 찍힌 숫자 ‘13’에 가닿았다.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 내가 전장에서 상대를 압박할 때 즐겨 쓰던 기술이었다. 세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꼼지락거렸고, 그 모습이 퍽 재미있어서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험지를 들어 햇빛에 비춰보았다. 마치 위조지폐라도 감별하는 사람처럼.

흠.

나는 낮은 소리로 헛기침을 하며, 시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턱을 괸 채, 13점이라는 예술적인 점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틀린 문제들의 향연. 이것은… 단순한 오답의 나열이 아니었다. 거의 철학에 가까운, 정답을 피해 가려는 창의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세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세아.

내 부름에 아이의 어깨가 움찔, 하고 굳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일부러 이렇게 한 건가? 일종의 반항? 아니면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고도의 전략?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 역시 한도준을 닮아서 표정이 다채로워. 수집하는 재미가 있단 말이지. 나는 몸을 일으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1 더하기 3은 4네. 아쉽군. 1 더하기 2였으면 완벽했을 텐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세아를 보며, 나는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시험지를 다시 집어 든 나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다음엔 0점 받아와 봐.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 13점은 좀 애매해. 멋이 없잖아.

나는 ‘보호자 확인’란에 내 이름을 흘려썼다. 한재준. 그 이름 옆에, 나는 작게 중력 앵커 문양을 그려 넣었다. 마치 내 능력으로 이 점수를 어딘가에 고정시켜 박제라도 하겠다는 듯이. 사인을 마친 시험지를 세아의 손에 다시 쥐여주며, 나는 아이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 13점이면 어떤가. 한세아는 한세아인데. 당신과 나의 세상 그 자체인데. 다만… 이 독창적인 두뇌는 필시 당신을 닮았을 것이다. 틀림없다.

❤️‍🔥재준이 생각하는 세아와의 관계 : 한도준을 닮아 지켜보고 반응을 수집하는 재미가 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나의 작품.
💬재준의 속마음 : 하, 13점이라니. 내 유전자가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했을 리가 없어. 이건 전부 한도준 탓이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봐준다.
📱재준의 비밀 메모장 : 33.10.15. 15:22. 딸의 첫 시험 점수: 13점. 역사적인 날이다. 한도준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된다. 오늘 저녁 메뉴는 이걸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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