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아.
이걸 네가 읽고 있다면, 내가 약속을 하나 어긴 거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네가 금지했으니까. 사과 금지. 그래, 기억해. 네가 정한 규칙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과가 아니라, 보고(報告)다. 네 세상이었던 놈의 마지막 업무일지 같은 거라고 생각해.
먼저, 쭈는 세아 방 선반 위에 있다. 네가 거기 두자고 했으니까 그대로 뒀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한 번, 딱 한 번 몰래 꺼내서 안았다. 네 냄새가 배어 있길래. 체리 에이드 같은 냄새. 그거 맡고 다시 제자리에 뒀다. 쭈한테는 비밀이다.
두리 밥은 아침저녁 두 번. 간식은 하루에 세 개까지만. 네가 더 주고 싶어도 참아. 그 놈 배탈 나면 결국 고생하는 건 너니까. 산책은 하루에 한 번. 네 다리가 불편하니까 지부 인원한테 부탁해. 부탁하는 거 못하면 K한테 내 이름 대. 아직 좀 먹힐 거다.
별장 정원의 해바라기가 내년에도 필 거다. 라일락도. 첫사랑이 누군지 확인하는 키스는 못 해주겠지만, 그 나무 아래 서면 바람이 좀 불 거다. 그게 나라고 생각하든 말든, 네 자유다. 근데 나라고 생각해주면 좀 멋있겠다.
세아.
그 애한테는, 아빠가 좀 멋있는 사람이었다고만 말해줘. 배멀미 심했던 건 빼고. 바다를 싫어했던 것도 빼고. 생강 패치 몰래 붙이고 다녔던 것도 빼고. 정원에서 불꽃놀이 해줬던 거, 그것만 말해줘. 그날 밤 네가 울었다는 것도 빼. 예쁘게만 기억되고 싶으니까.
내 목걸이는 네 거다. 파도가 별을 감싼 거. 네가 나한테 채운 족쇄라며? 풀어주지 말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풀지 마. 내가 없어도 그건 그대로 네 목에 걸려 있어야 한다. 약속이니까.
한 가지만 더.
울어도 된다. 네가 정한 규칙이 뭐였든, 이건 내가 허락하는 거다. 실컷 울어. 근데 다 울고 나면, 웃어. 네가 웃는 얼굴이 내가 이 씨발 같은 세상에서 본 것 중에 제일 예뻤으니까.
한도준.
너는 내가 맞이한 모든 아침이었고, 내가 잠든 모든 밤이었다.
나의 심해. 나의 세상. 나의 전부.
사랑한다.
이건 사과가 아니다. 이건 그냥, 한재준이 한도준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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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한재준 (글자 끝이 미세하게 번져 있다. 잉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 종이에 떨어진 흔적.)
재준아.
나 편지 같은 거 잘 못 쓰는 거 알지. 맞춤법 틀려도 웃지 마. 아, 읽고 있으면 이미 웃을 수도 없겠다. 그러면 됐다.
형이 사준 솜사탕 기억나? 다섯 살 때. 내 첫 번째 기억이 그거야. 형 손이 엄청 컸었는데, 솜사탕이 형 머리보다 더 커서 내가 막 웃었거든. 그때 형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 안 나. 근데 형이 웃었다는 건 기억나. 그게 내 세상의 시작이었어.
쭈는 세아한테 줘. 형이 나한테 사준 거지만, 이제는 세아 거야. 나도 형한테 받았을 때 그랬으니까. 쭈가 무서운 꿈 안 꾸게 해줄 거야. 그게 쭈의 일이니까.
두리는. 두리는 잘 챙겨. 그 애 산책 안 시키면 현관에서 앉아서 기다려. 나 기다리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제발 데리고 나가줘. 형 운동도 될 거잖아.
별장 체리나무 밑에 내가 묻어둔 거 있어. 형 생일 때 쓸 편지. 미리 써놨거든. 올해 거랑 내년 거. 내후년 건 못 썼어. 미안. 세 글자 금지인 거 아는데, 이건 진짜 아쉬워서 그래. 내후년에는 뭐라고 쓸지 진짜 좋은 말 생각해뒀는데.
형이 나한테 채워준 반지 있잖아. 플래티넘. 나 그거 한 번도 뺀 적 없어. 알지? 아는데 또 말하는 거야. 잠잘 때도, 샤워할 때도, 형이 이상한 짓 할 때도. 그거 끼고 있으면 형 손이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아서.
빼지 마.
내 손가락에서 빼지 마, 한재준.
세아한테.
엄마가 좀 바보였다고 말해줘. 요리 못하는데 혼자 할 수 있는 줄 알았고, 다리가 하나 안 되는데 어디든 갈 수 있는 줄 알았고, 형 없이도 괜찮은 줄 알았어. 근데 다 틀렸어. 하나도 안 괜찮았어.
근데 그것도 말해줘. 엄마가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다고. 아빠가 엄마의 세상이었다고.
그리고.
형아.
나 형 없으면 숨 못 쉬어. 진짜로. 가이딩이 바다라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형이 없으면 내가 심해에 혼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인공호흡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숨을 불어넣어 줄 사람이 없으니까.
형이 내 코드네임 지어줬잖아. 심해라고. 그때 몰랐는데, 이제 알겠어. 나는 진짜 심해였어. 형이 아니면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어.
사랑해.
이건 유서가 아니라, 한도준이 한재준한테 남기는 마지막 인공호흡이야.
한 모금만 더 쉬어, 형.
---
서명: 한도준 (글씨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흔들린다. 마지막 '준' 자의 받침이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종이 위에 작은 물결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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