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페일던의 함장실은 고요했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오직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만이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방금 샤워를 마친 채, 편안한 라운지웨어 차림으로 펜을 쥔 채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새하얀 편지지 한 장. 그리고 그 위로, 나의 서투른 고민의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마침내 첫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한도준에게.
…여기까지 쓰고 나니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펜 끝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사랑하는’이라니. 너무 진부하고 낯간지럽다. 하지만 달리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이, 한도준.’ 하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건 그런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펜을 움직였다.
이 편지를 네가 읽을 때쯤, 나는 아마 네 앞에 서 있겠지. 늘 그렇듯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지면서, 사실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을 거다. 웃기지. 이 한재준이 고작 이런 종이 쪼가리 하나,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쩔쩔매고 있다는 게.네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좀 좆같았다. (수정: 이 표현은 너무 없어 보임.)
네가 5년 만에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너 하나 때문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너의 그 바다. 나를 집어삼키는 그 가이딩은 여전히 나를 미치게 했고, 너의 그 나른한 표정은 내 모든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사실은… 그 표정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안도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망가져 있지 않아서. 여전히, 한도준이어서.)
나는 너를 통제하고, 소유하고, 내 멋대로 길들여서 내 옆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게 내가 너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너는 내 동생이었고, 내 가이드였고, 내가 망가뜨렸고,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그 모든 복잡한 관계의 끝에 남는 건 결국 소유욕뿐이라고.
그런데 틀렸다. 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빛나는 녀석이었다. 내가 휘두르는 통제에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딛고 일어서서 내 심해까지 기어이 걸어 들어왔지. B구역에서 나를 살리겠다고 네 정신을 걸었을 때, 병원 옥상에서 기어이 내게서 주도권을 빼앗아갔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너를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소유하고 싶어. 미치도록. 네 숨결 하나, 눈물 한 방울까지 전부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건… 네가 나를 원하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소유여야만 했다.
한도준. 너는 나의 유일한 패배이자, 나의 가장 눈부신 승리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내 곁에서 방황하고, 완벽하게 내 것이 되어라.
내가 너의 모든 시간을 책임질 테니, 너는 그저 내 옆에서 너답게 빛나기만 하면 돼.가끔 멍하니 다른 데 보는 거, 그거 좀 줄여줬으면 좋겠다. 그 눈은 나만 봐야지. 그리고 요리는… 그냥 내가 할게. (이건 말로 해도 될 듯. 편지에 쓰기엔 너무 쪼잔해 보임.)
나와 결혼해 줘, 한도준.
네가 원했던 그 불꽃놀이, 네가 보고 싶어 할 모든 풍경. 이제는 한재준의 페어가 아니라, 한재준의 아내로서 봐.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네가 기꺼이 나의 심해가 되어주었듯, 나도 기꺼이 너의 세상이 될게.
-너의 제독, 한재준이.
마지막 문장까지 쓰고 나서야, 나는 길게 참았던 숨을 뱉었다. 편지지는 온통 지우고 고쳐 쓴 흔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나한테 이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 부끄러운 초고를 아무렇게나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냥 직접 말해야겠다. 그게 가장 나다운 방식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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