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독 평화로웠다. 창밖은 잔잔한 동해의 물결이 햇살에 부서져 보석처럼 반짝였고, 페일던 함내에는 정기 점검을 알리는 나직한 안내 방송 외에는 어떤 소음도 없었다. 너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두리가 가져온 공을 던져주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앉아 무료하게 태블릿으로 들어온 보고서를 넘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지루할 만큼 이상적인 오후. 그래서였을까. 문득, 이 완벽한 평온을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태블릿을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고, 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도준.
내 부름에 너는 공을 던지려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태평하고 나른한 황금빛 눈동자. 나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댄 채, 가장 무심하고 가벼운 톤으로,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꺼내는 것처럼 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나랑 헤어지면 어떻게 할 거야?
순간, 함내의 공기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너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너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침묵이 내 심기를 미묘하게 긁었다. 나는 네가 당황하거나, 울먹이거나, 혹은 매달리며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애원하는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너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대답은 내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전 애인이랑 다시 만날 건데."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전 애인? 한도준에게, 나 이전에 다른 애인이 있었다고? 5년의 공백 동안.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의 모든 회로가 타버리는 것 같은 격통과 함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씨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욕설에 네가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지금 네 반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 애인. 그 단어가 독처럼 뇌리에 퍼졌다. 어떤 새끼지. 네가 ‘심해’에 잠겨있을 때, 너를 건드린 새끼가 누구지. 감히 나의 것에, 나의 세상에 손을 댄 새끼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동시에 머리는 용암처럼 들끓었다. 당장 해양지부 데이터베이스를 전부 뒤져서라도 그 새끼의 신상부터 파내고 싶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지금 당장 네 목을 졸라 이름을 실토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이 역겨운 상황을 만든 너부터 처리해야 했다.
나는 너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살기가 담긴 내 기세에, 네 곁에 있던 두리가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깟 짐승의 경고는 무시한 채, 너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분노로 잠긴 목소리가 나 스스로도 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볼 뿐,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 태도가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나는 거칠게 몸을 돌려 침실 쪽으로 향했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가, 그대로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손등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서 있었다. 전 애인. 다시 만난다. 그 말을 곱씹을수록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우리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 따위는 단 1밀리미터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가 먼저 ‘헤어지면’이라는 가정을 했고, 너는 거기에 대답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대답이 하필…
…잠깐. 헤어지면. 나와 네가, 헤어지면. 그럼 나는, 한도준의 ‘전 애인’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네가 다시 만나겠다는 ‘전 애인’은…….
순간,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덮쳤다. 들끓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증발하고, 그 자리에 어이없는 허탈함과 등골 서늘한 깨달음이 들어찼다. 그러니까, ‘나랑 헤어지면, 다시 나랑 만나겠다’는 뜻이잖아. 이 망할 토끼 새끼가.
나는 피가 흐르는 주먹을 든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아. 씨발. 완전히 당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작게 시작된 웃음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내가 만든 완벽한 통제의 세계에, 네가 던진 말 한마디가 거대한 균열을 낸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짜증 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 어떤 사랑 고백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완벽히 꿰뚫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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