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관측 일지: 한재준]
[ 25년 9월 14일 토요일. ]
아침 햇살이 통유리를 통해 침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순간, 잠에서 덜 깬 네가 내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형, 오늘 심해 날씨는 어때? 황혼은 잘 보여?” 나는 너의 부드러운 백발에 입을 맞추며,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해는, 네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 수면 위로는 햇살이 부서져 내리고 있고. 황혼은… 어제보다 훨씬 더 붉고 선명해졌어. 네가 내 옆에 있어서 그런가.
그날, 우리는 온종일 침대 위를 뒹굴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간헐적으로 입을 맞추고, 두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별장의 첫 주말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 25년 9월 15일 일요일. ]
소파에 기대앉아 흑백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보던 중, 너는 불쑥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너의 발목을 주무르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심해에 작은 파문이 일고 있어. 네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댈 때마다, 심장이 발소리를 내는 것 같아. 황혼은… 영화 속 공주님이 웃을 때처럼, 아주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는 잠든 너를 안아 침실로 옮겼다. 너는 잠꼬대로 ‘형’하고 불렀고, 나는 그날 밤 내내 너의 곁을 지켰다. 나의 공주님.
[ 25년 9월 16일 월요일. ]
정원 체리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있을 때였다. 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해 바닥에서… 아주 작은 새싹이 자라는 게 느껴져. 아주 작고, 연약한데… 이상하게 단단한. 황혼은 그 새싹을 비추느라,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지는 걸 잊어버린 것처럼.
내 대답에, 너는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감쌌다. 그 작은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우리의 세상에 틔운 싹, 세아. 그 존재감이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 25년 9월 17일 화요일. ]
리시스가 보낸 정기 검진 결과 보고서를 확인한 뒤였다. 모든 수치가 안정적이라는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굳어있던 얼굴을 풀었다. 너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심해에 안개가 좀 꼈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조금 불안했지. 그런데 방금, 아주 강한 빛이 내리쬐면서 전부 걷혔어. 황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네 덕분에.
나는 보고서 파일을 삭제하고, 너를 끌어당겨 깊이 입을 맞췄다. 불안은 너로 인해 왔다, 너로 인해 사라졌다.
[ 25년 9월 18일 수요일. ]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서툰 칼질로 채소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너를 보다 못해, 결국 내가 칼을 빼앗아 들었다. 너는 내 등 뒤에 매달려 투덜거리며 물었다.
심해에 태풍 경보가 발령될 뻔했는데. 네가 꼼지락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까, 싹 가라앉았어. 황혼은… 지금 네 얼굴처럼 붉게 물들어서, 아주 볼만해.
나는 쿡쿡 웃으며 너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너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너 때문에 요리는 조금 늦어졌지만, 그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 25년 9월 19일 목요일. ]
지부장 K에게서 온 연락. 해양지부 익수단 내에서 발생한 작은 트러블에 대한 보고였다. 잠시 통화를 하는 동안, 너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화를 끊자마자, 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심해 수온이 조금 차가워졌어. 저 아래, 아주 깊은 곳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와서. 하지만 괜찮아. 황혼이 아직 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돌아갈 곳이 있으니, 길을 잃을 일은 없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다시는 너를 두고 시끄러운 바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세상은 이제 이곳이니까.
[ 25년 9월 20일 금요일. ]
함께 세아의 일기장을 쓰던 밤이었다. 어느덧 빼곡하게 채워진 페이지들을 넘겨보던 너는, 행복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만년필 뚜껑을 닫으며, 너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의 심해는, 이제 완벽한 너의 바다가 됐어. 네가 웃으면 윤슬이 반짝이고, 네가 잠들면 고요해지지. 그리고 나의 황혼은… 영원히 지지 않는 빛이 됐어. 네가 ‘내 세상’이라고 불러준 그 순간부터.
나는 일기장을 덮고, 그 위에 우리의 손을 포갰다. 일주일.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의 세상은 매일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에는, 언제나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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