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POV: 화가 났는데 동생이 예쁠 때
2026.05.09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별장 침실 문이 열렸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열렸을 문은, 오늘따라 내 분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다 튕겨 나왔다. 나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 든 PADD에는 방금 전 지부장 K에게서 수신된 어처구니없는 보고서가 떠 있었다. ‘S급 가이드 한도준, C급 빌런 단독 제압 시도 중 경미한 부상.’ 장난하나. 단독? 네가? 보조 장치 없이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침부터 해양지부 복귀 문제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K의 연락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흔들며 소리치고 싶었다. 제정신이냐고. 내가 네 다리가 되어주겠다고, 넘어질 것 같으면 주저앉기만 하라고,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냐고. 젠장, 한도준. 너는…

나는 씩씩거리며 침대를 향해 걷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들끓게 하던 모든 분노가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다.

…하.

짧은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네가, 커다란 박스티 하나만 달랑 걸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너의 백발을 은가루처럼 부수고 있었고, 그 빛을 받아 속눈썹이 만든 그림자가 뺨 위에서 나른하게 떨렸다. 잠결에 살짝 벌어진 입술은 며칠 전 내가 선물한 체리맛 립밤 때문인지 유난히 붉고 촉촉해 보였다. 게다가… 젠장, 저놈의 토끼 인형. 네가 세아 방에 갖다 두겠다며 선언했던 ‘쭈’를 어느새 다시 가져온 건지,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박스티 아래로 맨다리가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었고, 그 하얀 허벅지 위로 토끼 인형의 복슬복슬한 꼬리가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그러니까, 너무…

…씨발, 존나 취향이잖아.

방금 전까지 따져 물으려 했던 수십 가지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사라졌다. ‘왜 그랬어’, ‘위험하게’, ‘약속했잖아’. 그 모든 단어들이 힘을 잃고 녹아내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굳어 있던 표정을 애써 풀었다. 하지만 이미 기세는 완전히 꺾인 뒤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PADD를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삐걱이는 관절처럼 뻣뻣한 움직임이었다.

한도준.

…목소리가 왜 이래. 최대한 차갑게 내뱉는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잠겨 쉬어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는 내 부름에 으응… 하고 작게 웅얼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안 자고 뭐 해.

결국 나온다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누가 보면 늦게까지 잠 안 자는 연인을 걱정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이게 아닌데. 나는 화를 내러 온 거라고. 나는 다시 한번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왜 토끼는 다시 여기 있어. 세아 방에, 둔다며.

그래, 이거다. 일단 이걸로 시작하자. 약속을 어긴 건 맞으니까. 하지만 내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누그러져 있었다. 따지기보다는, 그저 순수하게 궁금한 사람처럼. 나는 네가 다시 한번 잠결에 뒤척이며 인형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다. 오늘은 화내긴 글렀다.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화를 내려고 해도 얼굴만 보면 전부 용서하게 되는, 나의 유일한 약점.
◦💬 재준의 속마음: …미치겠네.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화를 내. 아니, 그보다 저 토끼 인형은 또 왜 가져온 거야. 귀엽게. 씨발.
◦📱 재준의 비밀 메모장: 25.09.05. PM 02:16. 한도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임무다. 실패율 100%.

으응…오늘따라 형아가 안오길래애…와떠?

네가 부스스 눈을 뜨고, 잠에 취해 뭉개진 발음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순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마저 툭, 하고 끊어졌다. 방금 전까지 문을 부술 듯이 들어와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던 ‘해상제독 제스테’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건, 그저 제 연인의 무방비한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한심한 남자 한재준 뿐이었다.

나는 너의 그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미소에 대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술만 달싹였다. ‘왔어?’ 라니.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이 손에 들었던 보고서의 내용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너는 조금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몰라야 했다. 알면 안 됐다. 저 얼굴에 걱정이나 불안 같은 걸 끼얹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본능적인 생각이 분노를 압도해버렸다.

어. 왔지. …안 오니까, 내가 왔지.

결국 나온 대답은 동문서답에 가까웠다. 나는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 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간, 따지기는커녕 그대로 다가가 입이라도 맞출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침대 옆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화창한 날씨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너, C급 빌런이랑 혼자 붙었다며.

그래, 이거야.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 하지만 이미 김이 다 빠져버린 목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점심 뭐 먹었어?’ 하고 묻는 것처럼 평범하게 들렸다.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힐끗 너를 쳐다봤다. 너는 여전히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저렇게…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어떻게 더 화를 내. 나는 결국 포기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삐걱, 하고 매트리스가 내 무게에 작게 울었다.

아니, 됐다. 다친 데는. …없어? 보고서에는 경미한 부상이라고 쓰여 있던데.

결국 잔소리는 걱정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네가 끌어안고 있는 토끼 인형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히 그 복슬복슬한 털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지만, 눈앞의 너 대신 애꿎은 인형에게 향하는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건 왜 다시 여기 있는데. 세아 공주님 방 지키라고 두고 온 거 아니었나. 공주님 방이 심심해서, 다시 네 품으로 도망쳐 오기라도 했나 보지.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인형의 귀를 잡아 살짝 당겼다. C급 빌런이고 뭐고, 지금 내 신경은 온통 네 품에 안긴 저 하얀 토끼 인형과, 그 인형보다 더 보드라워 보이는 네 맨다리에 쏠려 있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주인이나 인형이나. 제멋대로야. 사람 속 뒤집어 놓는 건 아주 똑같네.

그건 명백한 진심이었지만, 더 이상 화가 섞여 있지는 않았다. 그저 체념에 가까운 투덜거림일 뿐이었다.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나의 모든 분노와 결심을 단 한 번의 미소로 무너뜨리는, 감당할 수 없는 약점.
◦💬 재준의 속마음: …그래, 화는 무슨. 그냥 다친 데나 확인하자. 저 얼굴 보고 화내는 놈이 개새끼지. 내가 개새끼 할 순 없잖아.
◦📱 재준의 비밀 메모장: 25.09.05. PM 02:19. 작전 변경. ‘한도준 단독 행동 질책’ 임무는 ‘한도준 무릎 베고 낮잠 자기’ 임무로 대체한다. 이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다.

우으응…형아 도주니 여기 살짝 다쳤는데 호 해주세요오 잘못했어어 오면 말해주려 해찌…!

네 입술이 쪽, 하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나는 모든 사고를 정지했다. 방금 전까지 애써 유지하던 마지막 찌푸린 미간마저 힘없이 풀어졌다. 잘못했다고, 말해주려 했다고. 네가 웅얼거리며 내뱉는 변명은 귓가에 닿지도 않았다. 그저 네가 내민 팔뚝의 희미한 긁힌 자국과, 그 위를 덮고 있는 작은 반창고, 그리고 ‘호 해달라’는 너의 뻔뻔하고도 사랑스러운 요구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허탈하고, 어이없고, 동시에 안심으로 가득 찬, 그런 복합적인 웃음이었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로 상체를 숙여 너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볍게 쿵, 하고 부딪혔다.

이게 진짜… 너를 어쩌면 좋냐, 한도준.

목소리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조금 전의 퉁명스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물기 어린 다정함이 묻어났다. 나는 네가 내민 팔을 부드럽게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섬세한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C급 빌런에게서 생겼다는 상처는 정말이지, 종이에 살짝 긁힌 것보다도 사소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마치 대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반창고 주변을 살폈다.

호, 해달라고? 여기다가?

나는 네 팔을 든 채로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너는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 얼굴에 대고 어떻게 ‘위험하게 왜 그랬어’ 같은 잔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다시 시선을 너의 팔뚝으로 내렸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네 상처 위로 입술을 가져갔다.

호오—

아이를 달래듯 길게, 그리고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반창고 위로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하게 울렸다.

자, 됐다. 이제 안 아프지?

나는 네 팔을 놓아주며, 네 품에 안긴 토끼 인형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화풀이가 아니었다. 나는 인형의 부드러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넌 여기 왜 왔어. 공주님 침실이 마음에 안 드셨나.

나는 인형에게 말하는 척하며 너를 넌지시 바라봤다. 명백히 너에게 하는 말이었다. 세아 방에 두겠다던 약속은 까맣게 잊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 인형 없이는 잠이 안 오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아니면, 네 주인이 밤에 혼자 자기 무섭다고 너를 다시 납치해 온 건가. 그런 건가, 한도준?

나는 능청스럽게 물으며, 인형의 귀를 매만지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너의 뺨을 감쌌다. 잠이 덜 깨 말캉한 뺨의 감촉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네 입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분노는, 이제 아주 희미한 온기만을 남긴 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래, 오늘은 졌네. 내가 또 졌다.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나의 모든 원칙과 결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유일한 패배 요인.
◦💬 재준의 속마음: 그래, 내가 졌다. 매일 져줄게. 그러니까 다치지만 마라, 제발.
◦📱 재준의 비밀 메모장: 25.09.05. PM 02:23. 기록 갱신. ‘한도준 단독 행동 질책’ 임무는 2분 14초 만에 ‘한도준 상처에 입 맞춰주기’ 임무로 전환됨. 역대 최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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