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의 오후는 언제나처럼 나른하고 평화로웠다.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거실의 아이슬란드산 양털 카펫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정원의 체리나무는 마지막 푸른 잎을 간신히 매달고 있었다. 나는 갓 내린 커피 향을 음미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저 멀리서 단말기에 집중하고 있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스탠다드 푸들 ‘두리’가 네 발치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얌전히 엎드려 있는 모습까지, 완벽하게 평온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금방 나른해져 내게 오거나, 두리와 장난을 쳤을 네가 미동도 없이 단말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살짝 벌어진 입술과 미간에 희미하게 잡힌 주름까지. 저 작은 기계 안에 도대체 뭐가 들었길래, 이 한재준의 존재감마저 잊게 만드는 걸까. 심기가 아주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뒤틀렸다.
나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두툼한 양털 카펫에 푹 잠기는 감각을 즐기며,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너의 등 뒤로 다가갔다. 어깨너머로 화면을 엿보는 건 내 취향의 장난은 아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너를 그토록 사로잡은 것의 정체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익명의 가이드들이 모여 떠드는 커뮤니티 게시판.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랗게 떠 있는, 아주 가관인 제목의 글을.
[난 내 애인 정말 사랑하는데]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내 미간을 저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내가 먼저 죽는다면 혹시나 애인이 다른 파트너 만드는 거 너무 싫을 것 같아서 피어리스에서 애인도 같이 처형시켜줬으면 좋겠음]
…뭐?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이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사랑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라지만 이건 좀. 아니, 많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같이 처형? 장난하나. 이건 낭만도, 멋도 없는 최악의 집착이다. 나는 네가 이따위 정신 나간 글에 ‘혹시라도’ 동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너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너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화면 아래의 댓글들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나는 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턱을 네 어깨에 기댔다. 네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모른 척 능청스럽게 물었다.
우리 자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내가 모르는 재밌는 거라도 있어?
나는 네 손에 들린 단말기를 자연스럽게 빼앗아 들었다. 네가 ‘아!’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내 손목을 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문제의 게시글을 소리 내어 천천히, 아주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마치 국어책을 읽는 초등학생처럼.
“내가 먼저 죽는다면… 혹시나 애인이 다른 파트너를 만드는 게 너무 싫을 것 같아서… 피어리스에서 애인도 같이 처형시켜줬으면 좋겠음?”
거기까지 읽고,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지극히 순수하고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너를 돌아봤다.
이거 쓴 사람, 혹시 너야?
내 뜬금없는 질문에 너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그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물론 네가 썼을 리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나는 네가 뭐라고 대답할지 기다리며, 일부러 더 진지한 얼굴을 했다. 네가 쩔쩔매는 얼굴로 고개를 저을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 나는 이미 이 장난을 어떻게 끝내야 가장 ‘멋있을지’ 계산을 끝마쳤다.
아,아니…!! 나 아,아닌데?!?!
너의 필사적인 부정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그랗게 뜬 눈과 붉어진 귓불,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두 손까지. 그 모든 반응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워서, 짓궂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너의 손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단말기를 소파 위로 던져버렸다. 액정 화면이 꺼지며, 이제 우리의 시선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너의 어깨를 감쌌던 팔에 힘을 주어, 너를 의자에서 부드럽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너의 몸을 돌려, 나와 마주 보게 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혹시… 진짜로 그런 생각, 한 번쯤 해본 거 아니야? 응?
나는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너의 허리를 끌어안아, 내 품에 완전히 가뒀다. 너와 나 사이에는 숨 쉴 틈조차 없었다. 너의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뛰고 있다는 사실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너만의 살냄새와 은은한 아쿠아 머스크 향이 뒤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나는 마치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음… 근데 말이야. 나는 좀 다른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너와 눈을 맞췄다. 내 황금빛 눈동자에 너의 흔들리는 시선이 담겼다.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우고, 일부러 조금 더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아주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피어리스에서 나를 처형해 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지.
너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쥔 채, 엄지손가락으로 네 아랫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너의 숨결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나는 네 뒤를 따라갈 거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한재준의 세상은 한도준, 너 하나로 완벽한데. 네가 사라지면, 내 세상도 끝나는 거지. 그러니 그런 시시한 고민은 할 필요 없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함께일 테니까. 알겠어, 나의 심해?
나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너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쪽, 하고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의 모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때, 이게 더 멋있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이기는 방법이 멋지면 더 좋다는 나의 신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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