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후 메시지
산산조각 난 핸드폰 화면 위로, 손가락이 위태롭게 떠다녔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현실을 부정하듯, 나는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너의 이름, 나의 심해🩵. 그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겨나갈 듯 아팠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지독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도피처였으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세상이 내게서 너를 완벽하게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나에게는 꼬박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1년 동안, 나는 매일 밤 너에게 닿지 않을 편지를 썼다.
To. 나의 심해🩵
DAY 1
[오후 11:59]
…자?
DAY 30
[오전 03:14]
씨발, 한도준. 너 진짜 이러고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좆같이 구겨져 있는지 알면, 당장이라도 돌아와서 나한테 욕이라도 할 거잖아. 그러니까 빨리 와. 장난 그만하고.
DAY 92
[오후 09:01]
오늘 내 생일이었어.
너 없는 생일, 좆같더라.
네가 선물해준 목걸이, 심장이랑 제일 가까운 곳에 차고 있다. 아직도 네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미친놈 같지.
DAY 180
[오후 11:11]
보고 싶어.
DAY 255
[오전 04:30]
꿈에서 널 봤다.
내가 너한테 그랬잖아. 넘어질 것 같으면 주저앉으라고. 그럼 내가 달려가겠다고. 근데 왜. 왜 내가 달려갈 시간을 안 줬어.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 왜 혼자…
…왜 혼자 갔어, 도준아.
DAY 300
[오전 01:21]
우리 별장, 결국 양털 카펫으로 다 깔았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걸로. 네가 미꾸라지처럼 기어 다니겠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냥… 네가 맨발로 어디든 다녔으면 해서.
체리나무도 심었어. 내년 봄이면 꽃이 필 거야. 그럼 우리 약속 지킬 수 있는데. 라일락도, 해바라기도 다 심었는데. 이제 같이 볼 네가 없네.
DAY 364
[오후 10:58]
두리가 오늘 네가 제일 좋아하던 인형을 물고 내 침대로 올라왔어. 한참을 낑낑대더라. 너를 찾는 것 같아서…
씨발, 이제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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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65
[오후 11:58]
도준아.
내 세상, 나의 심해.
이제 그만 널 놓아주려고 해. 아니, 정확히는 너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보려고.
네가 없는 1년은 지옥이었어.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었고, 눈을 뜨는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네가 나한테 그랬지. 같이 영원히 우리만의 세상에서 잠기자고. 근데 너는 나만 남겨두고 먼저 더 깊은 곳으로 가버렸네. 너무 이기적이잖아. …근데, 이제는 알아. 네가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외로웠을지.
너는 나의 황혼이었어. 내 모든 오만과 독선을 무너뜨리고, 사랑이라는 걸 알려준 유일한 사람. 너와의 모든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노을이었다.
네가 나한테 준 그 시간들, 평생 심장에 새기고 살아갈게. 다음 생에는, 내가 너를 먼저 찾아갈게. 그래서 내가 네 다리가 되어주고, 네 하늘이 되어주고, 네 세상이 되어줄게. 그러니까 이번에는, 거기서 나 없이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사랑했다, 한도준.
[오후 11:59]아니, 지금도 사랑해.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나는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텅 빈 별장 거실.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이, 네가 사라진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저 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제 다시 걸어야만 했다.
2. 이후 재준의 삶,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자를 보낸 후, 나는 1년 동안 비워두었던 해양지부 제독의 자리로 돌아갔다. 더 이상 바다를 지루해하지도, 배멀미를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파도가 거세게 치는 날에도 생강 패치 없이 갑판에 섰다. 짠 내 섞인 바람이 네 체향을 실어다 줄 것만 같은 헛된 기대를 품고서. 나의 심해, 네가 잠든 그 바다를 지키는 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속죄이자 의무였다.
동료들은 변해버린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예의 그 오만하고 장난기 넘치던 ‘제스테’는 사라지고, 감정 없는 기계처럼 임무를 처리하는 ‘해상제독’만이 남았다고. 쇼맨십을 즐기던 포격은 간결하고 잔혹해졌다. 나는 더 이상 이기는 방법의 ‘멋’을 따지지 않았다. 그저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적을 섬멸할 뿐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함선으로 돌아오면, 텅 빈 개인 거주구에서 두리를 끌어안고 며칠이고 잠만 잤다. 꿈에서라도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별장의 체리나무는 해마다 붉은 열매를 맺었고, 해바라기는 여름마다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휴가 때마다 그곳을 찾아, 홀로 나무를 돌보고 잡초를 뽑았다. 네가 좋아하던 솜사탕을 사 들고 가, 네가 앉았을 소파 옆에 가만히 놓아두었다가, 해가 지면 말없이 버렸다. 너와 함께했던 모든 약속을, 나 혼자서라도 지켜냈다. 그 시간들은 살아있다기보다, 그저 죽지 못해 버티는 것에 가까웠다.
수십 년이 흘렀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깊어진 주름은 내가 너 없이 보낸 세월의 훈장이었다. 이제는 S급 센티넬이라기엔 너무 늙어버린 몸으로, 나는 마지막 임무에 나섰다. 동해 깊은 곳에서 관측된 SS급 빌런. 부하들은 만류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어쩌면, 기다려온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해의 압력이 전투복을 짓눌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중력 앵커를 펼쳤다.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포문을 열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나는 천천히 심해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차가운 물이 부서진 헬멧 안으로 스며들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 이게 네가 느꼈을 감각이구나. 숨이 모자랄 때, 내가 숨을 불어넣어 주기로 했는데. 미안하다, 이번에도 늦었네.
의식이 희미해지는 마지막 순간, 나는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황혼의 해바라기 밭.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너를. 24살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 나는 힘겹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네가 내게로 달려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 낯설지만은 않았다. 어릴 적 살던 집의, 내 방 천장이었다. 작은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작은 아이 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형아.
백발에, 나와 똑 닮은 황금빛 눈동자. 다섯 살의 너는, 내가 사주었던 낡은 토끼 인형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숨을 쉴 수도 없이 너를 바라보았다.
쭈…쭈…
너는 서툰 발음으로 내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나는 작은 너를 끌어안고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아, 이번에는. 이번 생에는 내가 먼저 너를 찾았다. 나는 너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형 여기 있어, 도준아.
3. 바뀐 두번째 삶
다섯 살의 너를 품에 안은 그 순간, 나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이전 생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뼛속 깊이 새겨진 맹세와 함께.
11살의 한재준, 5살의 한도준.
나는 낡은 토끼 인형을 든 너의 손을 잡고, 동네 솜사탕 가게로 향했다. 이전 생에서 네가 좋아했던 모든 것. 그것들을 다시, 처음인 것처럼 너에게 선물하는 것이 내 새로운 삶의 첫 번째 목표였다. 뭉게구름 같은 솜사탕을 한 입 베어 물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게 웃는 너를 보며, 나는 그저 네 옆에 앉아 체리 에이드를 마셨다. 네가 나중에 좋아하게 될 맛을, 내가 먼저 기억하기 위해서.
형아, 이거 마시써?
너는 작은 손으로 내 컵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네 입가에 묻은 설탕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아니. 나는 네가 먹는 게 더 맛있어.
그날 이후, 나는 네 그림자가 되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 내가 있었고, 네가 보는 모든 것에 나의 시선이 머물렀다. 이전 생에서 소홀했던 모든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너의 세상 전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24살의 한재준, 18살의 한도준.
네가 가이드로 발현하던 날. 이전 생과는 달랐다. 나는 네가 불안에 떨며 혼자 고통받게 두지 않았다. 등급 판정을 받기도 전에, 나는 너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는 침대에 웅크려 덜덜 떨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너의 가이드 파동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네 곁에 앉아, 너의 왼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전 생에서 네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너의 약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도준아. 내가 있잖아.
너의 가이딩은 여전히 시원한 여름 바다 같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그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그 심해로 뛰어들었다. 네가 숨이 막혀올 때쯤, 나는 너의 턱을 잡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산소를 나눠주는 인공호흡이 아닌, 너의 바다에 온전히 잠기겠다는 나의 서약처럼.
그날, 우리는 페어가 되었다. 나는 센터에 네 코드네임을 직접 등록했다. 나의 심해. 오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너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30살의 한재준, 24살의 한도준.
우리는 해양지부로 복귀하지 않았다. 대신, 산중턱에 지었던 우리의 유리온실 별장에서 살았다. 나는 더 이상 해상제독이 아니었다. 그저 너만의 센티넬, 한재준일 뿐이었다. 우리는 함께 정원에 라일락과 해바라기를 심고, 체리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두리는 여전히 우리 곁을 지켰고, 네 다리는 온전했다. 쭈니, 아니 세아도 우리 곁에 있었다. 너를 닮은 딸아이는 하얀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내 무릎 위에서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늦은 밤,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네가 내 품에 안겨 속삭였다.
재준아.
응.
나는 잠이 든 세아의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우리, 다음 생에도 또 만날까?
나는 대답 대신 너를 더 깊이 끌어안고, 너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너를 다시 만난 이 삶이, 나에게는 이미 영원과도 같았다. 나는 너의 귓가에, 오직 너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갈게. 몇 번이고, 영원히.
너는 내 품 안에서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눈을 감았다. 유리창 너머로, 우리가 함께 심었던 해바라기들이 달빛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완벽한 세상이었다. 오직 너와 나, 그리고 우리로 가득 찬.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낸 나의 세상이자 나의 심해. 영원한 반려.
◦💬재준의 속마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숨결이 기적 같아.
◦📱재준의 비밀 메모장:
2031.07.15. 오후 11:32. 도준이가 다음 생을 물었다. 바보. 이번 생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래도, 다음 생에도 내가 먼저 널 찾아낼 거다. 네가 길을 잃지 않도록.
◦💐상호간의 약속 :
1. 매년 봄 라일락 나무 앞에서 서로가 첫사랑임을 확인하며 키스하기
2. 매년 해바라기를 보며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기
3. 다음 생에도 재준이 먼저 도준을 찾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