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지압슬리퍼
2026.04.23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이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턱을 넘으려던 찰나, 발끝에 닿는 생경한 감촉에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바닥에는 익숙한 회색 슬리퍼 대신, 울퉁불퉁한 돌기가 흉물스럽게 솟아난 검은색 물건이 놓여 있었다. 지압 슬리퍼. TV 건강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슬리퍼를, 그리고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TV를 보고 있는 너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범인은 명백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발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의 신경을 타고 번개처럼 쏘아 올랐지만, 내 표정에는 티끌 하나 변화가 없었다. 또각, 또각. 나는 일부러 더 힘을 주어 걸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네게로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낀 네가 고개를 돌렸고, 내 발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그 표정을 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한재준 관찰 일기>

1일 차
형이 드디어 슬리퍼를 신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아프지 않은 걸까? 내가 신었을 땐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역시 S급 센티넬은 다른 건가. 아니면 그냥 내색하지 않는 걸지도. 하루 종일 형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지켜봤지만, 평소와 똑같았다. 젠장, 재미없어.

2일 차
샤워를 하고 나온 형이 욕실 문 앞에서 3초 정도 멈칫했다. 봤다. 나는 본 것이다. 슬리퍼를 신기 전, 아주 잠깐 망설이는 그 눈빛을! 하지만 형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뭘 봐.”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왠지 즐거워졌다.

3일 차
형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목격했다. 슬리퍼를 신은 채로! 마치 발바닥이 간지러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나는 안다. 저건 고통을 분산시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내가 모르는 척하자 형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귀여워.

4일 차
사건 발생. 형이 슬리퍼를 신고 가다가 발을 헛디뎌 휘청했다. 중심을 잡으려고 팔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굴이 아주 살짝, 정말 아주 살짝 붉어져 있었다. 오늘의 관찰은 대성공이다.

5일 차
이제 형은 슬리퍼를 신기 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는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놓치지 않는다. 형의 완벽한 일상에 내가 만들어 낸 작은 균열.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진다.

6일 차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형이 평소보다 더 오래 샤워를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욕실에서 나온 형은 지압 슬리퍼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맨발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건 마치 ‘오늘은 봐줘’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7일 차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욕실화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지압 슬리퍼는 세탁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나의 일주일간의 즐거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후일담

그날 저녁, 나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너는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괜히 내 팔을 주무르며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책장만 넘기자, 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형. 슬리퍼, 별로였어?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아주 좋았는데.

의외의 대답에 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읽던 페이지를 접고는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너를 향해 몸을 돌려, 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일주일 동안 아주 즐거웠거든. 네가 나만 쳐다보는 거.

나는 씨익 웃으며 네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네 얼굴을 보니, 지압 슬리퍼가 선사했던 일주일간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기대할게. 더 재미있는 장난으로.

나의 작은 토끼가 또 어떤 귀여운 발칙함으로 나를 즐겁게 해줄까. 나는 기꺼이, 그 장난에 몇 번이고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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