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시말서
2026.04.18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너에게 먹일 크림수프에 넣을 후추를 찾으러 주방 선반을 뒤지던 그때, 내 전용 수신기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빌런 출현 경보와는 다른, 훨씬 더 불길하고 서슬 퍼런 호출음. 지부장 K의 직통 호출이었다. 나는 잠시 인상을 썼지만, 이내 수신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별장의 모든 통신망, 심지어는 스마트 오븐의 액정 화면까지 번쩍이며 단 한 문장이 떠올랐다.

[S급 센티넬 제스테. 즉시 본부 지부장실로 출두할 것. -K]

결국 나는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너를 별장에 혼자 남겨두고 서울 본부로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실의 문을 열자,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힌 지부장 K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내가 그동안 무시했던 수십 건의 출동 명령서와 작전 보고 요청서가 탑처럼 쌓여 있었다.

“해상제독, 자네가 무단으로 이탈한 임무가 몇 건인지 아나?”

K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맞은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글쎄요,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까?

내 뻔뻔한 태도에 K의 관자놀이 핏줄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책상 위에 두툼한 종이 뭉치와 펜 하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시말서. 자네가 무시한 임무 보고서 한 건당 열 장씩. 총 사백이십구 장이다. 오늘 밤 안으로 다 채우기 전엔 이 방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아.”

사백이십구 장. 나와 네가 다시 만난 후 함께한 날의 수였다. K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향해 덧붙였다.

“사유는 구체적으로, 육하원칙에 맞춰 작성하도록. 자네의 그 잘난 S급 센티넬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강제 노동의 밤. 나는 한숨을 쉬며 펜을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시말서의 ‘사유’ 란에 정자로 또박또박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말서 1/429]
- 소속: 해양지부 익수단 해상제독 제스테
- 작성 사유: X월 X일 A급 빌런 ‘모르페우스’ 출현 당시 임무지 무단이탈 건
- 상세 경위: 당시 본 센티넬은, 나의 유일한 가이드이자 나의 심해인 한도준이 갓 목욕을 마치고 나와 젖은 머리카락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그를 두고 차마 자리를 이탈할 수 없었음. 그의 눈동자는 동해의 새벽보다 깊었고, 그의 살결에서 나는 향기는 세상 그 어떤 빌런의 악취보다도 본 센티넬의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음. 이는 국가 안보보다 중차대한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밝히는 바임.


나는 다음 장을 넘겨 두 번째 시말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시말서 2/429]
- 작성 사유: B구역 게이트 이상 징후 보고 묵살 건
- 상세 경위: 나의 가이드, 한도준의 입술이 체리 에이드보다 붉고 솜사탕보다 달콤하여, 그 맛을 확인하느라 보고를 들을 경황이 없었음. 참고로 그는 내가 입혀준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위험하여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완벽히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음. 따라서 본 센티넬의 모든 감각은 오직 그에게로만 향해 있었음을 보고함. (뒷면: 한도준이 입었던 티셔츠 상세 도면 및 재질 분석 첨부)


그렇게 밤새 이어진 나의 시말서는 점점 더 가관이 되어갔다. ‘나의 심해가 배고프다 하여 크림수프를 끓여주다 보니 통신을 놓쳤음.’, ‘그의 백발을 빗겨주는 숭고한 의식을 치르던 중이라 응답할 수 없었음.’, ‘그의 함몰유두는 국보급이므로 관찰 및 보호가 시급했음.’ 등등. 급기야는 시말서 여백에 너와 나의 미래, 세아의 육아 계획, 심지어는 두리의 산책 코스까지 깨알같이 그려 넣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쓴 사백이십구 장의 연애편지, 아니, 시말서를 받아 든 K는 말없이 서류 뭉치를 들어 자신의 이마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한 달간의 ‘육아 휴직’을 명령했다. 물론, 급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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