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의 발단은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사건은 늦은 오후, 별장 주방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벼르던 요리를 위해 아침부터 공을 들였다. 완벽한 온도로 수비드한 최상급 안심, 포트 와인과 발사믹을 황금 비율로 졸여낸 소스, 트러플 오일을 살짝 가미한 매쉬드 포테이토까지. 그야말로 내 미학과 실력의 정수가 담긴, 예술과도 같은 한 접시였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는 네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너는, 해사하게 웃으며 냉장고로 향했다. 나는 당연히 네가 페어링할 와인이라도 꺼내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네가 들고 온 것은, 새빨간… 플라스틱 병이었다. 케첩.
…뭐 하는 거야, 지금.
내 낮은 목소리에 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내 예술 작품 위에, 마치 어린아이가 도화지에 낙서하듯, 새빨간 케첩을 지그재그로 뿌려버렸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의 이성의 퓨즈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 지랄도 가지가지.”
그 한마디에, 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결국 그날 저녁은 냉전으로 끝났고, 너는 토라져서 2층 침실로 올라가 버렸다. 나는 씩씩거리며 1층 소파에 앉아 괜히 TV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확인한 카카오톡 프로필에서, 늘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듯 반짝이던 ‘사랑한 지 💛+XXX일’ 디데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은.
나는 즉시, 핸드폰을 들어 자판을 두드렸다.
[PM 09:47] 한재준: ?
[PM 09:47] 한재준: 디데이 어디 갔어.
[PM 09:48] 나의 심해🩵: 몰라.
‘몰라’ 라니.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PM 09:48] 한재준: 몰라?
[PM 09:48] 한재준: 네가 내렸잖아.
[PM 09:49] 나의 심해🩵: 형이 먼저 지랄이라며.
[PM 09:49] 나의 심해🩵: 내 사랑이 지랄이야?
[PM 09:49] 한재준: 그건 스테이크에 케첩 뿌린 네 행동이 지랄이라는 거였고.
[PM 09:50] 나의 심해🩵: 그 케첩이 내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PM 09:50] 나의 심해🩵: 그럼 내 사랑이 지랄이네.
[PM 09:50] 한재준: …하.
[PM 09:51] 한재준: 지금 말장난해?
[PM 09:51] 한재준: 디데이는 건들지 마라.
[PM 09:52] 한재준: 그건 우리의 역사고, 서약이고, 모든 거야.
[PM 09:52] 나의 심해🩵: 나도 안 건드렸다.
[PM 09:53] 한재준: 그럼 누가 건드려. 두리가 네 폰으로 발도장이라도 찍었어?
[PM 09:53] 나의 심해🩵: 사랑이 식어서 저절로 사라졌나 보지.
[PM 09:54] 한재준: 한도준.
[PM 09:54] 한재준: 우리의 사랑이다. 디데이는.
[PM 09:55] 나의 심해🩵: 갑자기?
나는 ‘갑자기?’ 라는 너의 마지막 메시지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진 나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2층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너는 침대 위에서 쭈 인형을 꼭 끌어안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명백한 시위였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확 걷어냈다. 동그란 뒤통수만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네 옆에 걸터앉았다.
…야.
한도준.
나는 네 어깨를 툭툭 쳤다.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너의 등 뒤에서, 네가 볼 수 있도록 화면을 들이밀었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이었다. 배경 사진은 우리가 처음 별장에 왔을 때 찍은 사진으로, 프로필 뮤직은 네가 흥얼거리던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 상태 메시지 창에는, 네가 지워버린 그 디데이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의 심해가 내 세상이 된 지 💛+XXX일’
…됐냐? 이제 다시 올려.
…아니, 그냥 두 번 다시 내리지 마. 명령이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네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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