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너에 대한 사랑이…! 막…! ㅇㅇ만 해!
2026.03.06

오후의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거실 바닥에 나른한 무늬를 그렸다. 1층의 어지러운 흔적은 말끔히 치워졌고, 나와 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평화로운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두리는 네 발치에서 얌전히 졸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체리나무 잎사귀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너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나른하게 감긴 속눈썹, 살짝 벌어진 입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온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내 속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심장이 어색하게 쿵쿵거렸다. 며칠 전부터,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나는 수많은 전장을 지휘하고,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도시의 지형을 바꾸는 남자다. 그런데 고작 말 몇 마디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나. 헛웃음이 나왔다. 멋지게, 근사하게, 이 감정을 표현할 가장 완벽한 단어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결국 나는, 가장 바보 같은 방식으로 입을 열고 말았다.

…한도준.

나는 네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자, 그 황금빛 눈동자에 시선이 붙들렸다. 준비했던 모든 멋들어진 문장들이 하얗게 증발했다. 나는 잠시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네가 좋아.

…젠장. 시작부터 글렀다. 너무 평범하고, 너무 밋밋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다. 그래, 비유. 뭔가 거대하고 압도적인 비유를 써야 했다. 내 능력처럼,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스케일로.

얼마나 좋냐면, 막… 막…!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멋진 것. 내가 가진 가장 대단한 것. 그래, 그거다.

…내가 가진 페일던 함선, 그 함포 전부를 한 번에 일제 사격했을 때 터지는 불꽃놀이만 해!

말을 내뱉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이게 아니었다. 이건 그냥 허세 가득한 중2병 환자의 대사잖아. 나는 망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하… 씨발, 잊어.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그냥… 내가 오늘 좀 이상하다.

최악이었다. 이건 낭만도, 무게감도 없는, 그저 어린애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중력 앵커로 네 주변의 모든 물건을 공중에 띄우는 게 더 진심 어리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이불이라도 걷어차고 싶은 심정으로,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너를 훔쳐보지도 못한 채, 그저 타오르는 창피함 속에서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해상제독의 위엄은 방금 전의 유치찬란한 고백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없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도 되는 유일한 사람.
💬재준의 속마음 : 하, 씨발… 차라리 죽여줘. 내가 왜 그랬을까. 불꽃놀이가 뭐야, 불꽃놀이가.
📱재준의 비밀 메모장 : 25.08.26. 14:31. 고백 금지. 특히 비유는 절대 금지.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비웃음, 혹은 어이없다는 한숨.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파가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내 손 위로 너의 작고 따뜻한 손이 겹쳐졌다.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너는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내리며, 얼굴이 새빨개진 나와 시선을 맞췄다. 너의 황금빛 눈동자는 놀리는 기색 없이, 그저 잔잔하게 나를 담고 있었다. 너는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형이 좋아.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꾸밈없는 고백. 내가 그토록 헤매다 실패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너는 수줍은 듯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꼼지락거리는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나 좋냐면… 막, 막… 내가 5살 때 형이 사줬던 솜사탕 처음 먹었을 때만큼!

…솜사탕? 나는 눈을 깜빡였다. 페일던의 함포와 솜사탕. 그 극단적인 스케일의 차이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너는 진지했다. 붉어진 뺨과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너는 용기를 내어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거의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때 세상이 전부 다 달콤해지는 것 같았거든. 지금 형이랑 있으면, 꼭 그때 같아.

너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창피함으로 들끓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함포의 굉음도, 화려한 불꽃놀이도 아니었다. 그저 작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솜사탕. 너의 첫 기억에 남아있는, 내가 너에게 주었던 작은 행복. 너는 나의 가장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었던 가장 순수한 순간을 꺼내어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감싸고 있을 수 없었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직도 내 손을 잡고 있는 너의 손을 마주 잡았다. 힘이 들어간 내 손에, 너의 가는 뼈마디가 느껴졌다.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여전히 얼굴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반칙이야, 한도준.

나는 나직하게 읊조리며 너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파 위에서 중심을 잃은 네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나는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너의 옅은 아쿠아 머스크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건 기쁨도, 안도감도 아니었다. 그저, 너라는 존재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잖아.

나는 웅얼거리며 너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체면도, 위엄도 전부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세상은 페일던의 함포가 아니라, 내 품에 안긴 너의 작은 몸과 달콤한 솜사탕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고 기꺼이, 몇 번이고 더 지고 싶은 패배였다.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 나의 가장 유치한 허세마저, 가장 순수한 진심으로 바꿔버리는 유일한 패배.
💬재준의 속마음 : …졌다. 완벽하게.
📱재준의 비밀 메모장 : 25.08.26. 14:36. 솜사탕. 다음에 꼭 사줘야겠다. 세상에서 제일 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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