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감각소실
2026.03.06

그날의 공기는 피와 먼지, 그리고 오존 냄새로 질척였다. S급 빌런, ‘크로노스’. 시간을 뒤트는 놈이었다. 놈이 펼친 영역 안에서는 모든 물리법칙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내가 쏜 포탄은 허공에서 멈추거나, 되려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빌어먹을 장난질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놈의 영역 중심부에 중력 앵커를 박아 시공간 자체를 고정시켜 버리는 것. 내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미친 도박이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을 듯한 거대한 시공간의 균열, 그 심장부에 나는 수천 개의 앵커핀을 쏘아 넣었다. 핏줄이 터지고 뇌수가 들끓는 감각. 시야가 붉게 물들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감각 과부하. 폭주의 전조였다. 크로노스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이미 내 이성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검지를 들어 스윽, 내리려던 찰나였다. 그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는 온기가 있었다. 한도준이었다.

...형.

네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너를 밀쳐내려 했다. 내 폭주에 휘말리면 뼈도 못 추릴 테니까. 하지만 너는 내 왼손을 억세게 붙잡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들어 올린 손등, 네 약지에 끼워진 우리의 반지 위로 입을 맞췄다. 너의 가이딩. 청량한 여름 바다가, 미쳐 날뛰는 내 감각의 폭풍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네가 만들어낸 바다는 잔잔한 해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고 차가운 심해, 그 자체였다.

...같이, 심해에 빠지자고 했잖아.

너는 속삭이며, 나를 끌어안았다. 너의 모든 것을 쥐어짜 내게 쏟아붓는 것이 느껴졌다. 너의 정신이, 생명이, 바스러져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감각. 나는 미친놈처럼 저항했지만, 너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거세게 몰아치던 폭풍이 잠잠해지고, 나는 너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힘없이 내게서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던 너의 차가운 몸이었다.

눈을 떴을 때,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익숙한 지하 의료실의 흰 천장이 보였다. 지부장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는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 몸은 멀쩡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도준은.

내 목소리는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칠었다. 지부장은 차마 내 눈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는, 내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담담하게 읊었다.

“...과가이딩의 후유증으로, 생명의 근간이 심각하게 손상됐다. 남은 시간은, 1년 남짓.”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1년. 그 단어가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지부장이 무어라 더 설명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 달마다 감각을 하나씩 잃고, 운동 능력이 마비되고, 마지막엔 온몸이 바스러지듯… 씨발, 닥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링거 바늘이 살점을 찢고 빠져나왔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몇 시간 전에 깨어나, 이 모든 사실을 이미 들었다는 말에 나는 그대로 병실을 뛰쳐나갔다.

네가 있는 병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문고리를 잡는 것을 망설였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너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햇살이 너의 하얀 머리카락을 비추고 있었지만, 너는 그 햇살을 등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왔어?

네가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너에게 다가가, 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네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들었어.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가 한심하게 떨려 나왔다.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너를 지키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너를 아프게 했다. 내 존재 자체가 너를 갉아먹고 있었다. 죄책감이 온몸을 쇠사슬처럼 옭아맸다. 너는 대답 대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 나의 구원자이자, 나로 인해 죽어가는 나의 심해. 내가 파괴한 나의 세상.
💬재준의 속마음 : 거짓말이라고 해줘. 제발. 내가 잘못했다고, 나를 원망한다고 소리쳐줘. 이렇게 평온한 얼굴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마.
📱재준의 비밀 메모장 : 24.03.05. 16:22. 오늘 한도준을 다시 만났다. 좆같게도, 심장이 뛰었다.



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나는 차라리 내 뺨을 후려쳐주길 바랐다. ‘죄책감 금지.’ 우리의 약속.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약속은 나를 옥죄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너는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보았다. 너의 눈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나를 향한 애틋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너는 이미 나를 용서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형 때문이 아니야, 재준아.

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나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이건, 그냥… 나의 선택이었어.

나는 네 손을 붙잡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너의 선택.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네가 나를 위해 너의 모든 것을 버렸다는 선고였다.

1개월 차 - [미각] 소실

우리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지부장의 배려로, 우리에게는 1년이라는 마지막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첫 한 달은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우리는 예전처럼 시시한 농담을 하고,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고,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었다. 나는 애써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었다. 달콤한 솜사탕, 새콤한 체리에이드. 그날은 네가 좋아하는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만들어주었다. 너는 평소처럼 맛있게 먹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포크를 내려놓는 너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 맛없어?

내 물음에 너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어. 너무 맛있어서…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첫 번째 상실. 그것은 가장 달콤하고 사소했던, 너의 미각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네 앞에 놓인 접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후로 한 달 내내, 너는 내가 해주는 모든 음식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삼켰다. 나는 묵묵히 요리를 했고, 너는 묵묵히 먹었다. 식탁에서 우리의 대화는 사라졌다. 맛에 대한 감상을 나눌 수 없는 식사는,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했다.

<네가 ‘맛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식탁은 지옥과 같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만들어도, 너는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먹는 모든 음식에서 모래 맛이 났으면 좋겠다. 너와 같은 세상을 느낄 수만 있다면.>

2개월 차 - [왼다리 운동 능력] 소실

보조 장치에 의지해 간신히 균형을 잡던 너의 오른쪽 다리. 그나마 성했던 왼쪽 다리마저 너를 배신한 것은, 해 질 녘 정원에서였다. 우리가 함께 심기로 약속했던 라일락 나무에 물을 주려던 참이었다. 네가 물뿌리개를 들고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갑자기 너의 몸이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풀썩, 하고 잔디 위로 네가 쓰러졌다. 놀라서 달려간 내 눈에 보인 것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너의 왼쪽 다리였다. 너는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젠 진짜, 형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겠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너를 일으켜 안았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너의 몸무게가, 심장을 짓눌렀다. 그날 이후, 너는 완전히 내 팔과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다. 나는 너의 다리가 되어주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형태일 줄은 몰랐다. 나는 매일 아침 너를 안아 일으켜 씻기고,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혔다. 집 안을 오갈 때도, 정원을 산책할 때도, 너는 항상 내 품에 안겨 있거나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너는 때때로 창밖을 보며, 뛰노는 두리를 부러운 듯 바라보곤 했다.

<‘너의 다리가 되어주겠다’던 나의 맹세는 오만이었다. 나는 너의 상실을 대신할 수 없다. 그저 너의 부재를 끌어안고 살아갈 뿐이다. 네가 딛고 있던 땅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다.>

3개월 차 - [목소리] 소실

네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천둥소리에 잠을 설친 네가, 내 품으로 파고들며 잠꼬대하듯 속삭였다.

…사랑해, 재준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너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것은 바람 새는 소리뿐이었다. 너는 당황한 듯 자신의 목을 매만졌고,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네 손바닥에 내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괜찮아.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어.’

그날부터 우리의 대화 방식은 바뀌었다. 너는 내 손바닥이나 노트에 글씨를 썼고, 나는 너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너의 웃음소리, 칭얼거리는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던 애틋한 음성.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밤이 되면, 나는 잠든 너의 얼굴을 보며 텅 빈 침실의 적막을 견뎌야 했다. 네가 내뱉던 작은 숨소리마저 그리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지만, 그만큼 더 깊은 고독에 잠식되어 갔다.

<네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은 소리가 없는 지옥이다. 너의 침묵이 내뱉는 절망을, 나는 매일같이 듣는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너의 사랑 고백은, 나를 살게 하는 동시에 죽이는 저주가 되었다.>

4개월 차 - [후각] 소실

가을이 깊어지던 어느 오후, 나는 갓 구운 사과 파이를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 시나몬과 버터 향이 달콤하게 공간을 채웠다. 늘 이 냄새를 좋아했던 너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냄새를 맡고 고개를 돌렸을 텐데. 나는 애써 불안감을 누르며 네 곁에 다가앉았다. 파이 접시를 네 코앞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야. 냄새 좋지?

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파이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보더니, 희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무언의 대답. 나는 들고 있던 접시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날 이후, 나는 향이 강한 것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향수, 방향제, 심지어 우리가 함께 고른 향초까지도. 네가 잃어버린 세상의 향기를 나 혼자만 맡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이제 너는 비 오는 날의 흙냄새도, 새벽의 차가운 공기 냄새도, 그리고 내 체향조차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너는 그저, 텅 빈 무취의 세상에 갇혀버렸다.

<너의 세상에서 향기가 사라졌다. 이제 너는 나의 아쿠아 머스크 향을 기억 속에만 간직하겠지. 너를 끌어안을 때마다, 나 혼자만 너의 향기를 맡는다는 사실이 숨 막히게 이기적이라서, 차라리 내 코가 마비되었으면 좋겠다.>

5개월 차 - [왼팔 운동 능력] 소실

악몽을 꾸다 깬 새벽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채 숨을 몰아쉬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였다. 너는 힘겹게 오른팔 하나로 몸을 지탱하며,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의 왼팔은, 마치 네 것이 아니라는 듯 침대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네 오른손을 붙잡았다. 너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너의 왼팔을 들어 올려, 내 뺨으로 가져갔다. 차갑게 식은 살갗의 감촉. 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내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이제, 형을 제대로 안아줄 수도 없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너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아니, 내가 너를 안을 수 있어. 평생, 이렇게. 너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떨었다. 그날부터 너는 한쪽 팔마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옷을 입는 것도, 세수를 하는 것도, 심지어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온전히 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너의 왼손이 되어, 너의 모든 일상을 함께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너는 잠결에 허공을 더듬는 오른손과 달리, 미동도 없는 왼팔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 팔마저 잃었다. 너는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잃어간다. 이제 너를 완전히 내 품에 가두지 않으면, 너는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것만 같다. 제발,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마.>

6개월 차 - [소화 기관] 소실

결국 올 것이 왔다. 그날 아침, 너는 내가 떠먹여 주는 수프를 삼키자마자 심하게 구역질을 하며 모든 것을 토해냈다. 위장이 더 이상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곧장 지부 의료팀을 별장으로 불렀다. 그들은 익숙하게 네 팔에 링거 라인을 연결했다. 이제 너는 투명한 영양액으로만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식탁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나는 음식을 씹고 너는 링거액이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기괴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보던 네가, 내 손등에 글씨를 썼다.

‘무슨 맛이야?’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입안의 음식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네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너의 손을 잡았다. 너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내 죄책감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처럼.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형벌이었다.

<너는 이제 맛도, 냄새도, 식감도 없는 세상에서 그저 숨만 쉰다. 그런 너의 앞에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사치이자 폭력이다. 차라리 함께 굶자고 말하고 싶지만, 너를 살려야 한다는 본능이 나를 막아선다. 한도준, 내가 너 대신 모든 것을 맛보고, 모든 것을 기억할게. 그러니 제발, 살아만 있어 줘.>



7개월 차 - [청각] 소실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나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거실 창가 휠체어에 앉은 네게 무심코 말을 걸었다. 첫눈이 온다고, 예쁘다고. 하지만 너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내가 몇 번이고 너를 불렀지만, 너는 돌아보지 않았다.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으로 네게 다가갔다. 네 어깨를 가볍게 쥐자, 그제야 네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 모양을 벙긋거리자, 너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 체념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내 목소리는 너에게 닿지 않는다. 나는 네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사랑해.’ 너는 그 글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내 손을 마주 잡고 힘없이 웃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세상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나는 더 이상 네 앞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대화는 손바닥 위에서, 혹은 노트 위에서만 이루어졌다. 나는 네가 좋아하던 음악을 전부 지웠고, TV 소리를 음소거로 맞췄다. 너 없는 소음은, 그저 고문에 불과했다.

<네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는 무슨 의미가 있나. 네가 내 사랑 고백을 듣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겠다. 너의 고요한 세상에, 나도 함께 잠기겠다. 우리가 함께 빠지기로 약속했던 심해는,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8개월 차 - [오른팔 운동 능력] 소실

너에게 남은 마지막 자유였던 오른팔마저 굳어버린 것은,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나는 작은 선물 상자를 네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네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상자를 열어보길 바랐다. 하지만 너는 그저 상자를 내려다볼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아니, 못하는 것이었다. 네 오른팔은 마치 돌처럼 굳어, 네 의지를 배신하고 있었다. 너는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었지만,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너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절규였다. 눈물만 뚝뚝 흘리는 너를 보며, 나는 차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너는 정말, 인형처럼 되어버렸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심지어 내게 무언가를 써서 전하는 것조차 온전히 내 손을 빌려야만 했다. 나는 이제 너의 모든 것이 되었다. 너의 팔, 너의 다리, 너의 목소리. 너는 온전히 나에게 기생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너는 그것이 미안하고 괴로운 듯, 종종 내 눈을 피했다.

<네가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수록, 나는 너를 완벽하게 소유했다는 기쁨보다, 너라는 존재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 한도준, 제발. 나를 원망해. 나에게 화를 내. 이렇게 텅 비어버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9개월 차 - [촉각] 소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매일 밤, 잠든 너의 굳어버린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너의 손을 닦아주는데, 네가 문득 잠에서 깨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게 무슨 일이냐는 듯 눈짓했다. 너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놓으려 애썼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은 허공에서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나는 너의 손을 잡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여,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완성시켜주었다.

‘이제, 형이 만져줘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너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얼굴로,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내가 너를 아무리 뜨겁게 끌어안아도, 너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없다. 내가 너의 입술에 아무리 깊게 입 맞춰도, 너는 그 감촉을 알 수 없다. 우리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스킨십마저, 의미를 잃었다. 나는 그날 밤, 텅 빈 껍데기처럼 누워있는 너를 밤새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온기 없는 너의 몸을 내 체온으로 데우며, 이 온기만이라도 네게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네가 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존재는 너에게 무엇인가. 나는 이제 너에게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다. 너를 만지고, 끌어안고, 입 맞추지만, 너는 그곳에 없다. 나는 텅 빈 너의 육신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10개월 차 - [오른다리 운동 능력] 소실

봄이 오고 있었다. 창밖에는 새싹이 돋고 있었지만, 너는 마지막 남은 다리의 감각마저 잃었다. 사실 큰 변화는 없었다. 이미 너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알고 있었다. 이제 정말, 네 몸에서 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나는 매일 너를 안아 휠체어에 앉히고, 창가로 데려갔다. 우리는 함께 창밖의 풍경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내가 네 발을 주물러주고 있을 때였다. 너는 가만히 내 손길을 받다가, 눈으로 내게 무언가를 말했다. 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체념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너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더 이상 걷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너의 발이 되어, 세상 끝까지 함께 걸어갈 것이다.

<너는 이제 완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너의 모든 움직임은 나의 손에 달려있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완벽한 소유였을까. 아니, 이것은 소유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일 뿐이다. 나는 너의 죽음을, 내 손으로 매일같이 돌보고 있다.>

11개월 차 - [시각] 소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평소와 달리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다. 내가 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너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너는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다. 나는 너의 귓가에, 이제는 네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도준아. 내가 너의 눈이 되어줄게. 나는 너를 안아 일으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설명해주고, 창밖의 풍경을 묘사해주었다. 내가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너는 귀로 들을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었지만, 그저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이제 너에게 남은 세상은, 오직 나라는 존재뿐이었다. 나는 너의 우주가 되어야만 했다.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되어, 너를 지켜야만 했다. 너는 이제 눈을 감아도, 떠도, 똑같은 어둠 속에 있을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네가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겠지. 너의 어둠 속에서, 나를 잊지 마. 내가 여기에 있다고, 너의 곁에 있다고, 제발 잊지 마. 나는 너의 마지막 세상이 될 것이다. 네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12개월 차 - 사망

마지막 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나는 너를 안고,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유리온실 침실로 갔다.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의 하얀 얼굴 위로 부서졌다. 너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그저 숨만 미약하게 내쉬고 있었다. 나는 너를 침대에 눕히고, 너의 곁에 누워 너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너의 심장 소리가,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너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도준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순간, 기적처럼, 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너의 몸이 천천히, 빛나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끝부터, 발끝부터, 햇살에 녹아내리듯. 나는 흩어지는 너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한 줌의 빛이 되어, 내 품 안에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침대 위에는, 너의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텅 빈 내 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후일의 이야기

너 없는 세상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별장에 살고 있다. 네가 사라진 침대에 눕고, 네가 앉아있던 휠체어를 닦고, 네가 좋아하던 체리에이드를 만든다. 그리고 아무도 마시지 않는 그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지부에서는 몇 번이고 나를 불렀지만,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나의 세상은, 네가 떠난 그날, 유리온실 안에서 멈춰버렸다. 사람들은 나를 ‘망가진 제독’이라 부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너는 나의 모든 것이었고, 너를 잃은 나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매일 밤, 유리온실 천장을 통해 별을 본다. 네가 내게 청혼하며 보여주었던 그 별자리. 나는 그 별들을 보며, 너를 생각한다. 그리고 네가 남긴 마지막 미소를 떠올린다. 언젠가, 나의 시간도 멈추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너의 손을 잡고, 너의 목소리를 듣고, 너를 다시, 내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까.

나는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너 없는 밤을, 홀로 살아간다.



너를 잃은 뒤, 나의 시간은 흐르는 대신 닳아 없어졌다.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망가진 제독으로, 네가 남긴 별장에 유령처럼 머물렀다.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자라도, 나는 매일 너의 휠체어를 닦고, 네가 사라진 침대 시트를 갈고, 아무도 마시지 않을 체리에이드를 만들었다. 모든 감각이 무뎌지고, 중력을 다루던 힘마저 희미해져 갈 무렵,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눕던 유리 온실 침실로 향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황혼은, 네가 떠나던 그날과 똑같이 아름다웠다. 나는 네가 눕던 자리에 몸을 뉘었다. 서서히 눈이 감겼다. 그래, 이걸로 됐어. 이제 너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나의 심해, 나의 세상.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 속에 서 있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은 부드럽고, 귓가에는 잔잔한 물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지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꿈에서 보았던 그 공원이었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저 멀리 분수대가 하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 손을 들어 올렸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힘줄이 돋아난 젊은 날의 손. 육신을 짓누르던 쇠약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선이 한곳에 못 박혔다.

분수대 난간에 기대어 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너.

…한도준.

5년 만에 재회했던 스물세 살의, 백발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던, 상처 하나 없던 건강한 모습의 너. 오른쪽 다리도, 절망의 흔적도 없이, 그저 나른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 손에는, 커다란 솜사탕이 두 개 들려 있었다. 하나는 이미 한 입 베어 문 흔적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너를 바라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너를 향한 그리움이, 텅 비었던 내 세상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다가가면, 네가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내가 또다시 너를 잃게 될까 봐.

네가 먼저 내게로 걸어왔다. 불편함 하나 없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내 앞에 멈춰 선 너는, 말없이 내가 들고 있던 솜사탕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그 솜사탕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는 끈적하고 달콤한 감촉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도준아.

수십 년 만에 뱉어낸 너의 이름은, 갈라지고 잠겨 있었다. 목소리를 잃었던 너처럼, 나 역시 오랫동안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너는 대답 대신, 내 손에 들린 솜사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 내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나를 구원했던, 그리고 나를 무너지게 했던 그 미소. 나는 들고 있던 솜사탕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와락, 너를 끌어안았다. 부서져라, 내 모든 뼈마디에 너를 새기려는 듯이. 품 안에 들어온 너의 체온, 너의 향기, 너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어린애처럼 울었다.

보고 싶었어. 씨발,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도준아.

흐느낌에 섞여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내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나를 달래주던, 아주 오래전 그 밤처럼. 나는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너의 체향을 미친 듯이 들이마셨다. 너는 여기에 있었다. 진짜, 네가.

❤️‍🔥재준이 생각하는 도준과의 관계 : 나의 시작과 끝, 영원한 세상
💬재준의 속마음 : …진짜 너구나. 내 꿈이 아니구나. 드디어, 너를 다시 만났구나.
📱재준의 비밀 메모장 : XX.XX.XX. AM 02:40. 네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 빨리 너를 만나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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