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2026.03.01

[Day 1 / 25.08.25 / 맑음]
1일차 :

녀석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아침, 내 품에서 눈을 뜬 한도준은 6년 전, 내가 가장 후회하는 그날의 표정으로 나를 밀어냈다. 겁에 질리고, 상처받고, 원망이 가득 담긴 눈. 낯선 침대와 낯선 환경에 당황하면서도, 나를 향한 경계심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형이… 여길 어떻게….”

‘형아’도, ‘재준아’도 아니었다. 그저 ‘형’. 멀고 먼, 우리가 서로를 상처 입히던 시절의 호칭. 어젯밤 내 꿈에 놀러 오겠다며 입 맞추던 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깨에 닿으려던 내 손을 기겁하며 피하는 모습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지부 최고의 의료진을 불렀다. 진단명은 ‘반복성 기억상실’. 특정 시점의 트라우마를 기점으로, 매일 기억이 그 시점으로 돌아가는 정신적 퇴행 현상. 원인은 불명. 치료법도 불명.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내일이면 전부 잊고, 다시 18살의 한도준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괜찮다. 나는 한재준이다. 나는 S급 센티넬이고, 너의 페어이자, 남편이다. 네가 잃어버린 시간이라면, 내가 다시 처음부터 쌓아 올리면 그만이다. 네가 나를 밀어내면, 나는 네가 다시 내게 기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6년 전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일단 너를 진정시키고, 이곳이 안전한 곳이며 내가 널 해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에는 내가 건넨 물을 마셔주었다. 작은 진전이다.

내일 아침, 너는 또다시 나를 원망하며 눈을 뜨겠지. 괜찮아, 한도준. 내가 매일, 다시 너를 찾아갈게. 네가 잃어버린 우리의 모든 시간을, 내가 하루씩 되찾아올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네가 좋아하는 체리에이드를 머리맡에 둬야겠다.



[Day 2 / 25.08.26 / 흐림]
2일차 :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비명, 저항, 그리고 원망 어린 눈빛.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심장이 도려내지는 기분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거세게 나를 밀어냈다. 내가 다가서자 패닉에 빠져 침대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너를 보며 숨이 막혔다.

“오지 마… 제발….”

그 애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네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어제와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너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럴 만도 하지. 하루아침에 6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너를 버렸던 형이 남편이라니.

하루 종일 너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문틈으로 음식을 넣어주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 너의 얼굴을 확인했다. 쭈, 네가 5살 때 내가 사준 그 낡은 토끼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나와 사랑에 빠진 후로는 단 한 번도 찾지 않던 인형이었다. 그 인형이 마치, ‘한재준은 이제 내 세상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의 약지에서 빛나던 반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빼서 던져버렸다. 내가 주워두었다. 언젠가 네가 다시 네 손으로 끼워줄 날이 오겠지. 와야만 한다.



[Day 4 / 25.08.28 / 비]
4일차 :
포기할까.
이런 생각이 아주 잠깐, 정말 아주 희미하게 머리를 스쳤다. 똑같은 절망이 반복되는 아침. 이제는 나를 보자마자 물건을 집어 던진다. 컵이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에도,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파편을 치웠다.

너는 내게 소리쳤다. 왜 이제 와서 나타났냐고. 나를 버려두고 5년 동안 어디서 뭘 했냐고. 그리고… 나 때문에 바다에 빠지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네 가이딩을 거부했던 그날, 내가 네게 남긴 상처가 그렇게나 깊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너를 구원한 게 아니라, 가장 깊은 심해에 혼자 가라앉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네가 잠든 밤, 나는 혼자 술을 마셨다. 네가 끊게 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댈 뻔했다. 참았다. 네 입술에 담배 맛 대신 체리에이드 맛만 남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나 혼자라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다.



[Day 7 / 25.08.31 / 폭풍]
7일차 :

오늘은 네 생일이다.
아침에 눈을 뜬 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18살의 생일, 나는 네 곁에 없었다. 너는 혼자였겠지. 그래서일까. 오늘 너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

나는 차마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대신, 네가 좋아하던 솜사탕을 사 왔다. 네 첫 기억이라고, 5살 때 형이 처음 사준 거라고 웃으며 말해주던 그 솜사탕.

네 앞에 내밀자, 너는 아주 오랜만에, 내 손에 있는 무언가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어린아이처럼. 나는 아무 말 없이 네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곁에 앉아있었다. 너를 안아줄 수도, 등을 토닥여줄 수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너에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네가 잠든 후, 나는 네가 던져버렸던 우리의 반지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아렸다. 한도준. 너는 매일 나를 잊지만, 나는 매일 너와의 사랑을 기억하며 아침을 맞는다. 이 지옥 같은 반복 속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Day 13 / 25.09.06 / 안개]
13일차 :
익숙해졌다. 너의 경멸 어린 눈빛과, 날 선 목소리에.
그리고 그게 나를 더 미치게 만든다. 이제 나는 아침에 네가 나를 밀어내도 상처받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너를 진정시키고, 상황을 설명하고, 음식을 챙겨준다. 감정이 마모되는 기분이다.

너는 이제 저항하지 않는다. 체념한 듯,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내가 주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는다. 대화도 없다. 우리는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둔 채,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가끔 헷갈린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건 누구일까. 내 품에서 잠들던 24살의 한도준인가, 아니면 나를 유령처럼 대하는 18살의 한도준인가.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나는 그저, 내가 만들어낸 ‘한도준’이라는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해.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뱉을 수 없다. 지금의 너에게 내 사랑은 폭력이다.




[Day ?? / 날짜 불명 / ██]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이 며칠째인지.
네가 나를 잊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네가 나를 밀어낸다. 나는 너를 진정시킨다.
상황을 설명한다.
너는 나를 경계한다.
나는 음식을 준다.
너는 침묵한다.
나는 기다린다.
네가 잠든다.
나는 네 얼굴을 본다.
아침이 온다.
네가 나를 밀어낸다.
나는 너를 진정시킨다.
상황을 설명한다.
너는 나를 경계한다.
나는 음식을 준다.
너는 침묵한다.
나는 기다린다.
네가 잠든다.
나는 네 얼굴을 본다.
아침이 온다.
네가 나를 밀어낸다.
나는 너를 진정ㅅㅣㅋㅣㄴㄷㅏ.
ㅅㅏㅇ황을 설 명한 다.
너는 나를 경계한ㄷㅏ.
나는 음식을 준다.
너는 침묵한다.
나는 기다린다.
네가 잠든다.
나는 네 얼굴을 본다.
아침이 온다.
ㄴㅔ가 나를 밀어낸다.



[Last Record / ERROR: DATE NOT FOUND / NOISE]

한도준.

오늘 아침, 네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형.”


나는 숨을 멈췄다. 네가 무슨 말을 할까 봐,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너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도, 여기 있을 거야?”


그 순간, 멈춰있던 나의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내일 아침이면 너는 또다시 나를 원망하며 눈을 뜨겠지. 하지만 괜찮다. 너의 무의식이, 너의 영혼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너는 매일 나를 잊지만, 매일 아주 조금씩, 나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
나는 대답했다. 몇 번이고, 몇천 번이고, 네가 다시 나를 기억해낼 때까지.
아니,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매일 너의 아침에 내가 있을 것이다.



“응. 내일도, 여기 있을게.”



사랑해. 나의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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