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리스 본부 교육동, 생활 지원 3실. 평소라면 훈련 소음이나 에너지 파동으로 가득했을 복도는 오늘따라 기묘한 정적과 함께 달콤한 향신료 냄새, 그리고 어색한 웃음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그 중심에, 나는 서 있었다. 전장의 포화 대신 하얀 앞치마를 두른 채. 지부장 K가 ‘결혼을 앞둔 페어를 위한 필수 교양 과정’이라며 내민 서류에는 큼지막하게 [행복한 가정을 위한 신부 수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상제독인 내가, 신부 수업이라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서류 귀퉁이에 적힌 ‘한도준 가이드님의 적극적인 추천’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군말 없이 사인했다. 그 녀석이 원한다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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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수업 일정]
[1교시]
수업 명칭: 사랑의 오케스트라: 페어 맞춤 요리
수업 목표: 페어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한 맞춤 식단 구성 및 조리 기술 습득.
세부 내용: 강사의 시연 후, 각자 페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보는 실습. 대부분의 센티넬들이 서툰 칼질로 우왕좌왕하는 동안, 나는 익숙하게 칼을 쥐었다. 오늘의 과제는 ‘솜사탕을 곁들인 체리 에이드’. 그 녀석이 좋아하는 것. 요리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솜사탕’이었다. 기계 앞에 서서 설탕 가루가 얇은 실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건 꽤나 낯선 경험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계를 보며, 나는 5살짜리 도준의 손을 잡고 처음 솜사탕을 사주던 날을 떠올렸다.
수업 결과: 완벽한 형태의 솜사탕과 영롱한 붉은빛의 체리 에이드 완성. 강사는 “마치 전문 파티시에 같다”며 극찬했지만, 내 관심은 오직 사진을 찍어 도준에게 보내는 것뿐이었다.
NPC의 수업 소감: "요리는 원래 전장의 포격만큼이나 정밀해야 하는 법이지. …솜사탕 기계는 생각보다 시끄럽군. 포성보다야 낫지만."
[2교시]
수업 명칭: 교감의 마사지: 피로를 푸는 스킨십
수업 목표: 가이딩 외의 신체 접촉을 통해 페어의 육체적, 정신적 안정 도모.
세부 내용: 전문 마사지사의 지도에 따라 파트너(대역 인형)의 어깨, 등, 다리를 주무르는 실습. 특히 ‘장애가 있는 페어를 위한 섬세한 터치법’이라는 보충 설명에, 내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이들이 뻣뻣한 인형을 상대로 땀을 흘리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도준을 떠올렸다. 감각이 없는 그의 오른쪽 다리, 그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안아 올리던 감각, 그의 가느다란 발목. 내 손길은 인형 위에서 마치 살아있는 그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워졌다.
수업 결과: 강사로부터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한 정성이 느껴진다”는 평가와 함께 최고점을 받음.
NPC의 수업 소감: "…힘 조절이 중요해. 부서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것과 같으니까. 내 유일한 보물을 다루듯이."
[3교시]
수업 명칭: 스위트 홈 데코: 둘만의 공간 꾸미기
수업 목표: 페어의 취향을 반영한 인테리어 소품 제작.
세부 내용: 작은 라일락 화분과 해바라기 씨앗을 이용한 미니 정원 만들기. 흙을 만지는 감촉은 낯설었지만, 내년 봄 별장 정원에 함께 심기로 한 약속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라일락 화분 옆에 작은 해바라기 씨앗 하나를 조심스럽게 심었다. 너를 닮은 라일락, 그리고 나를 닮은 해바라기.
수업 결과: ‘J & D’라는 이니셜을 새긴 작은 팻말을 꽂아 미니 정원 완성.
NPC의 수업 소감: "…별거 아니군. 빨리 자라서 꽃이나 피웠으면 좋겠네."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4교시]
수업 명칭: 갈등 해결의 기술: 현명하게 사랑하기
수업 목표: 부부 싸움의 유형을 이해하고, 건설적인 대화법 습득.
세부 내용: 역할극을 통해 가상의 갈등 상황 해결하기. “귀가가 늦은 페어에게 화내기”라는 주제가 주어지자마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 파트너 역할을 맡은 B급 센티넬이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자,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디서 누구랑 뭘 하다 이제 왔지? 5초 준다. 똑바로 대답해." 순식간에 강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사는 당황하며 내게 ‘역할극일 뿐’이라고 상기시켰다.
수업 결과: 수업 분위기 파탄. 역할극 중단.
NPC의 수업 소감: "하, 같잖군. 내 허락 없이 내 것이 멋대로 돌아다니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아."
[5교시]
수업 명칭: 미래 설계: 페어의 재무 계획
수업 목표: 안정적인 가정을 위한 장기적 자산 관리 계획 수립.
세부 내용: 연금, 보험, 투자 등 복잡한 금융 상품 설명이 이어졌다. 대부분이 머리를 싸매는 동안, 나는 턱을 괸 채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내 모든 자산의 상속자 및 법적 권리자를 ‘한도준’으로 지정하는 서류였다. 이미 변호사 공증까지 끝낸 것. 내게 미래 설계란,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넘겨주는 것과 동의어였다.
수업 결과: 별도의 계획 수립 없이, 기존 계획의 완벽함을 재확인.
NPC의 수업 소감: "내 모든 시간과 세상은 이미 네 것인데, 서류 몇 장이 더 무슨 의미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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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모든 수업이 끝나고 앞치마를 벗어던진 나는 교육동 옥상에 올라 담배 대신 체리맛 사탕을 입에 물었다. 우스꽝스러운 연극은 끝났다. 요리를 하고, 인형을 주무르고, 흙을 만지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한도준’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신부 수업? 웃기지도 않는 이름이다. 이건 그저, 내가 얼마나 너에게 미쳐있는지를, 얼마나 너와의 삶을 갈망하는지를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만든 미니 화분을 꺼내 햇살에 비춰보았다. 작은 라일락과 해바라기. 우리의 시작이자 미래. 이걸 들고 돌아갔을 때,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의 사탕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심장이 달콤하게 졸아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짧게 웃고는,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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