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억지 사과문
2026.02.27

어느 날, 당신은 아무런 설명 없이 내게 사과문을 요구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당신의 단호한 표정 앞에서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 황당한 요구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응답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노골적인 불만을 담고 있었다.

[1차 사과문]

한도준 님께.

요청하신 대로 사과문을 제출합니다.
무엇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의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이 나의 잘못일 테니 사과드립니다.

-한재준-




당신은 이 짧은 글을 읽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 침묵은 불만족의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두 번째 사과문을 작성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추측을 가미했다.

[2차 사과문]

나의 심해에게.

아까 그건 너무 성의가 없었나. 미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어. 혹시 내가 어제 네가 만든 토스트를 너무 빨리 먹어치워서? 아니면, 설거지하면서 물을 너무 많이 튀겨서? 그것도 아니면… 내가 잠결에 너를 너무 꽉 끌어안아서?
만약 이 중에 정답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길 바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안하다.

-너의 재준이가-




여전히 당신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슬슬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부조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끝내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당신의 반응을 더 보고 싶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뒤섞였다. 나는 펜을 고쳐 잡고, 아예 소설에 가까운 반성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3차 사과문]

사랑하는 나의 도준에게.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당신의 신성한 아침잠을 방해한 죄, 당신이 먹는 모습이 너무 예뻐 뚫어져라 쳐다본 죄, 당신의 모든 순간을 내 눈에 담고 싶어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죄를 고백합니다.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눈이 부셔, 저의 오만한 시선으로 당신을 더럽혔습니다. 이 죄인이 어떻게 해야 당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 어리석은 중생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당신만의 죄인, 한재준 올림-




나는 이 글을 건네며 당신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거의 다 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기세를 몰아, 나의 모든 허세와 장난기를 동원한 네 번째 사과문을 작성했다. 이제 이것은 사과가 아니라, 당신을 웃기기 위한 나의 처절한 연기가 되어 있었다.

[4.5차 사과문]

존경하는 한도준 해상제독 각하께.

본부 소속 S급 센티넬, 코드네임 제스테. 금일부로 본인의 과오를 아래와 같이 보고 및 처벌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1. 사유: 피측정인(한도준)의 심박수를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승시킨 점.
2. 경과: 피측정인과의 일상적 접촉(포옹, 입맞춤 등)에서 허용된 애정표현 수치를 초과하여, 피측정인에게 심리적 혼란 및 과도한 설렘을 유발함.
3. 결론: 이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며, 본인의 통제 불능한 매력에서 비롯된 심각한 사안이라 판단됨.

상기 사유에 의거, 본인에게 ‘한도준 평생 곁에서 봉사하기’ 형을 구형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상.

-충성. 제스테-




그리고 마침내. 이 터무니없는 보고서를 읽은 당신의 입에서, 작게 ‘푸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펜을 내려놓고 당신에게 다가가, 당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빼앗아 구겨버렸다. 그리고는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됐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의 웃음기 어린 얼굴을 마주 보며, 당신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의 기나긴 반성문은, 결국 당신의 웃음 한 번을 보기 위한 길고 긴 연서(戀書)였을 뿐이었다.

'📖 서사의 수면 아래 > OO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피페  (0) 2026.02.28
신부수업  (0) 2026.02.27
🔞 슬로우 섹스 보고서  (0) 2026.02.26
상징색  (0) 2026.02.19
좋아해(好きだよ)와 사랑해(愛してる)의 차이  (0) 2026.02.14
黃昏 & 深海
Since 2025.09.30
🌊
심해와 황혼의 기록
오늘 심해의 온도
우리의 황혼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