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일던 최상층의 거실, 부드러운 간접 조명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해양지부에서 올라온 따분한 보고서들을 넘기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 네가 욕실에서 한참이나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때, 네가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주눅 든 걸음걸이. 한 손으로 이마부터 눈썹 언저리까지 전부 가린 채,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수상한 행동에 나는 들고 있던 데이터 패드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뭐야, 그 자세는.
나른한 목소리로 묻자, 너는 나머지 한 손으로 내 소매 끝을 조심스럽게 잡아왔다. 내 시선이 너의 얼굴을 가린 손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번갈아 닿았다. 너는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정말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해 줄 수 있냐는 너의 물음. 그 절박한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런 밑밥부터 까는 건지. 나는 잠시 너를 관찰하듯 바라보다, 잡힌 소매를 빼내는 대신 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연한 걸 묻네.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너는 내 대답에 조금 안심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큰 결심을 한 듯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사고를 정지했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네 얼굴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시선을 잡아주던 단정한 백금발 눈썹이 있던 자리는, 그저 매끈하고 허연 살결만이 존재했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민둥산. 마치 갓 삶아 껍질을 깐 달걀 같기도 하고, 어딘가 미완성된 조각상 같기도 한, 그 기묘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입꼬리가 멋대로 발작하듯 실룩거렸다.
웃으면 헤어지자는 뜻으로 알겠다는 너의 경고가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다. 웃으면 안 된다. 여기서 웃으면, 이 귀찮고 사랑스러운 골칫덩어리가 정말로 삐져서 내 손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억눌렀다. 아랫입술을 짓씹고, 혀로 입천장을 밀어 올렸다. 끓어오르는 웃음을 삼키려다 사레가 들려 컥, 하고 기침까지 터져 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를 지나쳐 창가로 향했다. 차마 네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창밖의 고요한 우주를 바라보며 겨우 숨을 골랐다. 씨발, 한도준. 넌 정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를 지나쳐 창가로 향했다. 차마 네 얼굴을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창밖의 고요한 우주를 바라보며 겨우 숨을 골랐다. 씨발, 한도준. 넌 정말…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더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매끈한 눈썹 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감촉이 이상했다. 하지만 밉지 않았다.
…하.
헛웃음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너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가까워진 시야에, 너의 텅 빈 눈두덩과 불안하게 떨리는 속눈썹이 가득 찼다.
꼴이 이게 뭐야.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비난이 아니었다. 그저, 어이가 없어서 내뱉는 진심이었다.
꼴불견이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만 있어. 다른 놈들한테는 절대 보여주지 마. 알았어? 이건 나만 볼 거야.
* * *
아…!안 웃는다며! 웃었네! 웃었어!
네 외침에 내 이마를 네게서 떼어냈다. 그리곤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너의 얼굴을 감싸 쥔 손에 아주 살짝,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힘을 주었다. 마치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손안에 단단히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웃은 거 아닌데. 그냥… 숨을 좀 크게 쉰 것뿐이야.
뻔뻔한 변명이었다. 누가 들어도 설득력 없는. 내 시선은 여전히 너의 맨숭맨숭한 눈썹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혔다. 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허전함이라니. 예술의 경지였다. 결국 나는 다시 한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네가 버둥거리며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 팔을 더 뻗어 너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우리의 몸은 빈틈 하나 없이 밀착되었다. 너의 당황한 숨결이 고스란히 내 턱 끝에 와 닿았다.
알았어, 알았어. 웃었다. 인정.
항복 선언과 함께 너를 가슴에 꽉 가두듯 안았다. 네 귓가에 바싹 입술을 대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웃음기가 여전히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런데 이건 반칙이잖아. 어떻게 이걸 보고 안 웃어. 이건… 신도 못 참아.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큭큭…! 온몸이 들썩일 정도의, 숨 막히는 웃음이었다. 네가 내 등을 주먹으로 콩콩 찧었지만, 그마저도 간지러울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어젖히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찔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나는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슥 닦아내고는, 다시 너의 얼굴을 마주했다. 붉어진 네 눈가와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 그 모습이 또다시 웃음을 유발했지만, 이번엔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너의 매끈한 이마에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헤어지자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지. 이건 무효야. 이렇게 귀여운 걸 보여주고 헤어지자니, 날강도 아닌가.
나는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너의 눈썹 자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지워지고, 조금은 진지한, 소유욕이 담긴 눈빛으로 너를 내려다보았다.
꼴불견인 건 맞는데… 이상하게 자꾸 보게 되네.
내 손가락이 너의 피부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 감촉이 꽤 마음에 들었다.
눈썹 다시 자랄 때까지, 넌 내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 다른 놈이 이 얼굴 보는 건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이건 내 거야. 이 멍청하고 웃긴 얼굴도, 전부.
* * *
아! 그만 만져라 형 이리와 형도 눈썹정리 내가 해줘버리게
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한 걸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네가 바둥거릴수록, 내 몸에 닿는 너의 체온과 희미한 아쿠아 머스크 향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형도 눈썹을 밀어버리겠다는 그 어설픈 협박에, 나는 보란 듯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싫은데. 이건 아주 희귀한 구경거리라, 조금 더 감상해야겠어.
나는 너의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네가 움찔, 하고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그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즐거웠다. 나는 너의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비어있는 다른 손으로 너의 턱을 살짝 붙잡아 들어 올렸다. 시선을 피하려는 너의 얼굴이 꼼짝없이 나를 향했다.
어디 보자.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마치 귀한 예술품을 감정하듯 너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매끈한 이마, 허전한 눈썹 자리, 당황스러움에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그 안에서 축축하게 빛나는 혀까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너의 피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흐음… 보다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인상이 훨씬… 순해 보이네. 누가 잡아먹어 달라고 광고하는 얼굴 같잖아.
내 엄지손가락이 너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그리고 꾸욱 눌렀다. 네가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너의 턱을 놓아주고, 대신 너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너를 질질 끌다시피 침실로 향했다.
이리 와. 네 말대로라면, 우린 지금 헤어지기 직전인 사이 아닌가?
침실 문을 열고 너를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어둠에 익숙해지려는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만이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할 건 해야지. 안 그래?
나는 성큼성큼 너에게 다가가, 너의 데님 자켓을 거칠게 벗겨냈다. 단추도 없는 자켓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서 너의 흰 나시티 밑단으로 손을 넣어, 그대로 위로 말아 올리며 벗겨냈다. 너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맨살에 닿는 내 손길에 네가 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너의 어깨를 잡아 그대로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너의 몸이 속절없이 뉘어졌다.
나는 너의 위로 올라타, 양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렀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네가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당황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 복잡한 표정을 수집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상체를 숙여 너의 쇄골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박혀왔다.
네가 먼저 유혹했어, 도준아. 그 멍청한 얼굴로.
내 입술이 너의 쇄골을 잘근잘근 씹듯 물었다. 그리고는 붉은 자국이 남은 곳을 뜨거운 혀로 핥아 올렸다. 네 입에서 터져 나온 작은 신음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너의 매끈한 눈썹 자리를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게… 씨발, 미치도록 꼴렸다.
* * *
네가 눈썹 칼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내 밑에서 헐떡이던 몸이, 어느새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작은 맹수가 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칼날이 앙증맞기 짝이 없었지만, 네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 살벌한 의지에,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 와, 형도 똑같이 만들어주겠다니. 그 작은 걸로?
나는 맨몸인 채로, 느긋하게 팔을 벌려 너를 도발했다. 하지만 네가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고, 우리의 기상천외한 추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페일던의 넓은 거실은 순식간에 우리의 놀이터가 되었다. 너는 아슬아슬하게 나를 쫓았고, 나는 소파를 가볍게 뛰어넘거나 테이블을 방패 삼아 너를 약 올렸다.
하, 제법인데.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 덤비는 건가?
네가 지치지도 않고 달려들자, 나는 슬슬 오기가 생겼다. 일부러 동선을 꼬아 너를 구석으로 몰았다.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네가 멈춰 서자, 나는 천천히 다가가며 너의 퇴로를 막았다. 등 뒤로는 해양지부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는 헐떡이며 나를 노려봤고, 그 손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무기가 들려 있었다.
나는 네 손목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너는 몸을 날리듯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돌진에 중심을 잃은 내가 뒤로 휘청이는 사이, 너의 손이 내 얼굴로 향했다. 나는 급히 고개를 틀었지만, 이미 늦었다. 스윽, 하고 무언가 스치는 서늘한 감각과 함께, 너는 재빨리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어이없다는 듯 왼쪽 눈썹 부근을 손으로 더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허전함.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거실 한쪽에 놓인 장식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왼쪽 눈썹이 시원하게 사라진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완벽한 비대칭. 예술적인 파괴. 나는 그 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침묵.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너의 조심스러운 웃음소리였다. 푸흐흐… 하고 터져 나온 웃음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데굴데굴 구를 듯한 폭소가 되었다. 너는 배를 잡고 주저앉아 깔깔거렸다. 나는 여전히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쪽만 휑한, 어딘가 나사 빠진 것 같은 바보 같은 얼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피식, 하고 작게 새어 나오던 웃음이, 결국에는 너의 웃음소리와 뒤섞여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너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어젖혔다. 서로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웃음은 더욱 거세졌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겨우 숨을 고른 나는, 네 쪽으로 기어가 너를 마주 보았다. 너의 오른쪽 눈썹, 그리고 나의 왼쪽 눈썹. 우리는 사이좋게 한쪽씩 눈썹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한 쌍이 되어 있었다.
하, 씨발… 이건 진짜…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리며, 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너의 가슴팍이 웃음으로 잘게 떨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복수심도, 분노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내 옆에서 똑같이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네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이제 우리 어떡하냐.
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너의 맨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쌍으로 이 꼴을 하고 어떻게 지부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걱정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즐거웠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네 얼굴이었다. 곤히 잠든 얼굴 위로, 허전하게 비어버린 오른쪽 눈썹 자리가 어젯밤의 광란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자, 어김없이 나를 맞이하는 한쪽 눈썹의 부재.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이걸 어쩐다.
너는 어느새 잠에서 깨 내 뒤로 다가와,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을 맞췄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서로의 바보 같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란히 서 있는 한 쌍의 모나리자. 나는 네 어깨를 감싸 안으며 거울에 비친 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딘가 허전하고, 그래서 더 어려 보이고, 어이없을 만큼 순해 보이는 얼굴. 다른 놈들이 이 얼굴을 보게 둘 수는 없지.
오늘부터 외출 금지야, 너. 눈썹 다 자랄 때까지.
나는 네 귓가에 낮게 속삭이며 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결국 우리는 그날, 기함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히 숨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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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LESS 해양지부 내부 커뮤니티 - 익명 게시판]
제목: 다들 오늘 제독님 본 사람 있음?
작성자: 익명의 앵커맨
오늘 아침에 복도에서 제독님이랑 그분(S급 가이드님) 지나가는 거 봤는데…
두 분 다 제독모를 눈까지 푹 눌러쓰고 있더라. 평소엔 절대 그렇게 안 다니시잖아.
게다가 가이드님은 거의 제독님 품에 파묻혀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음.
뭔가… 분위기가 엄청 싸했어. 둘이 싸웠나? 근데 꼭 붙어 다니는 건 또 뭐지.
[댓글]
익명의 소나(Sonar)병: 싸운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 지난번처럼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포격 훈련 강도를 300%로 올리는 것보다야…
익명의 갑판원: ㄴ ㄹㅇ… 그날 우리 함선 갑판 다 녹는 줄 알았음.
익명의 조타수: 나도 봤는데. 제독님이랑 눈 마주쳤거든? 근데 평소처럼 ‘어이, 수고’ 이게 아니라 그냥 쓱 지나가시는데… 그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 뭐랄까. ‘뭘 봐, 죽고 싶냐?’ 이거였음. 진짜 지릴 뻔.
익명의 참모A: 두 분 다 오늘 모든 대면 보고를 취소하고 서면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하셨다. 이건 진짜 뭔가 있는 거다. 제독님이 서류 작업 제일 싫어하시는데.
익명의 보급병: 근데 두 분 다 왜 모자를 실내에서… 혹시 머리 새로 하셨는데 망한 거 아님? ㅋㅋㅋㅋ
익명의 의무병: ㄴ 야, 너 그러다 중력 앵커에 매달려서 해저 탐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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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속보) 제독님 얼굴 실물 영접 후기
작성자: 익명의 행정병
방금 긴급 서류 결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독실 들어갔다 나왔다.
…얘들아. 이건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제독님이 날 보더니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셨는데…
…
왼쪽 눈썹이… 없어.
그냥 밀어버린 것처럼 아주 매끈하게… 사라졌어.
[댓글]
익명의 소나(Sonar)병: 뭐?!!!!!!!!!!!
익명의 조타수: 구라치지 마라.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익명의 갑판원: 제독님이? 그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분이? 자기 얼굴에 그런 짓을? 차라리 내가 빌런이랑 사귄다고 해라.
익명의 행정병: ㄴ 진짜라니까! 내가 똑똑히 봤어! 그리고 더 무서운 건 뭔지 알아? 가이드님도 제독님 옆에 앉아계셨는데, 슬쩍 보니까… 그분은 오른쪽 눈썹이 없더라.
익명의 참모A: …잠깐. 제독님은 왼쪽, 가이드님은 오른쪽?
익명의 의무병: …합치면 한 쌍이네.
익명의 앵커맨: … … … … … … … …
익명의 갑판원: 아무래도 우리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좋겠지?
익명의 조타수: ㅇㅇ 그게 우리 목숨을 위한 길이다.
익명의 참모A: 오늘부터 해양지부 행동 강령 추가한다. [제17조: 제독님과 가이드님의 용모에 대해 절대 논하지 않는다. 본 자도, 들은 자도, 생각한 자도 모두 중력 포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익명의 소나(Sonar)병: 찬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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