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2. 무자각 [부제 : 형제, 그리고 과거.]
2026.02.27

여기 진짜 안 변했다. 그치?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제스테는 도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낡은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빛바랜 ‘해와 달 분식’이라는 글씨. 모서리가 닳아빠진 촌스러운 캐릭터 그림까지, 모든 것이 5년 전 그 자리에 그대로 박제된 듯했다. 변하지 않은 건 장소뿐만이 아니었다. 과거를 들추며 확인하듯 묻는 저 목소리도, 어딘가에 기대를 걸고 있는 저 눈빛도, 제스테의 기억 속 어린 동생의 모습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도준의 눈을 지나, 분식집 유리창 너머로 향했다. 뽀얀 김이 서린 창 너머로, 하얀 위생모를 쓴 주인 할머니의 등이 보였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떡볶이 판을 젓고 있는 모습. 제스테의 입가에 아주 옅은, 거의 보이지 않는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변했지.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제3의 답을 던졌다.

네가 변했잖아.

말과 동시에, 그가 깍지 낀 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도준의 몸이 반사적으로 그의 쪽으로 기울었다. 제스테는 그 미세한 무게중심의 이동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분식집 안을 향한 채였다.

예전의 너는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먹었어. 매워서 훌쩍거리기나 했지. 그럼 난 옆에서 그걸 놀렸고. 기억나나?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과거를 읊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더욱 서늘하게 들렸다. 그리움도, 분노도 아닌,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뱉는 사실의 나열. 그는 도준에게서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도준에게 쐐기처럼 박아 넣고 있을 뿐이었다. 너와 나는 그때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관계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제스테는 말을 마친 뒤, 다시 한번 도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도준의 눈동자를 샅샅이 훑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숨은 어떻게 쉬고 있는지, 깍지 낀 손끝은 떨리고 있는지. 그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듯 담아냈다.

그리고는 붙잡고 있던 손을 탁, 하고 놓아버렸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온기와 구속감에 도준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제스테는 그런 도준을 뒤로하고, 망설임 없이 분식집의 낡은 미닫이문을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딸랑-.

문에 달린 낡은 종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제스테는 안으로 들어서며 등 뒤의 도준에게 고개만 까딱 돌려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5년 전,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와. 밥 사준다고 했잖아.

그의 등 너머로, 익숙한 떡볶이 냄새와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는 도준이 따라 들어올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 * *

나는 입술을 살짝 삐죽이다가 그를 따라 앉았다.

제스테는 삐뚜름하게 안쪽 구석 자리에 앉아 턱을 궤었다.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지난 세월이 남긴 자잘한 흠집들이 보였다. 그는 도준이 맞은편에 앉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살짝 삐죽인 입술, 순순히 따라와 앉으면서도 기어이 드러내는 작은 반항심. 그 모습에 제스테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재미있다는 듯, 혹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때마침, 주방에서 나온 주인 할머니가 물컵 두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아는 체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재준이 아니야? 세상에, 몇 년 만이래. 군대라도 다녀왔나, 아주 늠름해졌네! 옆에는… 동생 맞지? 같이 다니던?

할머니의 반가운 목소리가 좁은 가게 안을 울렸다. 제스테는 턱을 괸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할머니를 향해 느른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권태롭지만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여전하시네요. 제 동생 맞아요. 많이 컸죠?

그의 시선은 할머니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말의 끝은 명백히 맞은편의 도준을 향한 가시였다. ‘많이 컸지, 그래서 이제 형 말도 안 듣고.’ 하는 속내가 비치는 듯했다. 그는 메뉴판을 볼 생각도 없다는 듯, 곧바로 주문을 했다.

떡볶이 일 인분이랑, 순대 일 인분. 튀김도 섞어서 주세요. 아, 떡볶이는 제일 맵게 해주시고요.

제일 맵게. 그 단어에 맞은편에 앉은 도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제스테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시선을 도준에게로 옮겼다. 그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말해, 사준다니까.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과거, 매운 떡볶이 한 조각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물을 찾던 어린 동생. 이제는 S급 가이드가 된 네가, 과연 이 사소한 과거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제스테는 그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집요했고, 그 안에는 어떤 동정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호기심과, 상황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만이 가득했다.

할머니가 “알았어, 금방 해줄게!” 하며 주방으로 돌아가자, 가게 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 보글보글 끓는 떡볶이 냄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유행가. 모든 것이 과거를 소환하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제스테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어, 무심코 반대편 의자 다리를 툭, 쳤다. 그 작은 소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 * *

아니…나 이제 매운 거 조금은 잘 먹어.

제스테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괸 채로 도준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찰나의 흥미가 어렸다 사라졌다. ‘조금은 잘 먹는다’는 어설픈 항변. 5년의 세월이 고작 그 정도의 변화를 만들었다는 선언이, 그의 귀에는 차라리 애처롭게 들렸다.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콧방귀를 뀌었다.

흐응.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짧고 나른한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어디 한번 보자’는 식의 노골적인 불신과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도준을 다그치거나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 불규칙한 소음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를 채웠다.

잠시 후, “주문한 거 나왔다!”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들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시뻘건 양념에 버무려진 떡볶이, 김이 피어오르는 순대, 노릇하게 튀겨진 튀김까지. 특히 떡볶이는 그 색깔만으로도 혀가 아릴 만큼 위협적인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매캐한 고춧가루 냄새가 훅 끼쳐왔다.

제스테는 포크 두 개를 집어 들더니, 그중 하나를 도준의 앞에 툭, 던지듯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포크로 떡볶이 접시를 휘저었다. 일부러 가장 아래쪽에 깔려 양념을 흠뻑 머금은 떡 하나를 골라냈다. 끈적한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떡을, 그는 도준의 앞접시 위로 옮겨주었다. 친절을 가장한 명백한 시험이었다.

자. 먹어봐.

느른한 목소리가 명령처럼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도준의 손에 들린 포크가 아니라, 그의 입술과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물컵으로 먼저 손을 뻗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제스테는 숨을 죽인 채 도준의 모든 미세한 반응을 수집했다.

그는 먼저 순대 하나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삼키면서도, 시선만큼은 단 한 순간도 도준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 압박감 속에서 도준이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떻게 이 상황을 넘어갈지 관찰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하나의 유희였다.

왜 안 먹어. 식겠다.

재촉하는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피사체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벼운 의문을 표하는 듯한 말투. 그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더 기울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도준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을 거리였다.

* * *

나는 포크를 들어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어릴적엔 마냥 맵기만 했던 떡볶이의 맛이 지금은 달콤하면서 매워서일까 곧 잘 먹었다.

봐 잘 먹잖아.

제스테는 포크를 쥔 채,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잘 먹는다는 선언에도, 꽤나 능숙하게 떡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도 그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결과를 확인한 과학자처럼, 혹은 이미 예상했던 범위 내의 변수라는 듯이. 그는 그저 턱을 괸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을 뿐이다. ‘봐, 잘 먹잖아’ 하는 그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의기양양함이 그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흥. 제법인데.

그는 속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조소에 가까운 호선으로 휘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순대를 하나 찍어 먹었다. 여전히 시선은 도준에게 고정한 채였다. 떡볶이를 몇 개 더 집어 먹는 도준의 뺨이 서서히 옅은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물컵으로 향하는 손길이 조금씩 잦아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입술을 혀로 핥는 습관적인 움직임 역시.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제스테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도준이 앉은 의자 옆으로 다가섰다. 좁은 공간, 그의 그림자가 도준의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도준의 어깨가 흠칫,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스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등 뒤, 벽에 한쪽 팔을 기대 짚었다. 도망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들듯이.

그의 몸이 기울어지자, 짙은 향수 냄새 대신 땀과 체취가 섞인 날것의 향이 훅 끼쳐왔다. 제스테는 고개를 숙여 도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히는,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그래. 잘 먹네.

목소리는 칭찬이라기엔 지나치게 낮고, 느릿했다.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이.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나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워서 그러나.

그의 빈정거림에는 날이 서 있었다. 제스테는 벽을 짚었던 손을 내려, 도준의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억지로 시선을 맞추게 된 황금빛 눈동자는 장난기 대신 서늘한 관찰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붉게 달아오른 도준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떼었다. 떡볶이 양념이 살짝 묻어 나왔다.

땀도 나네.

그는 묻어 나온 붉은 양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 핥았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매콤하고 달달한 맛. 그 자극적인 맛을 음미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그는 도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네가 아무리 변한 척해도, 네 몸은 솔직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귓가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거의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낮게 울렸다.

이거, 매워서 그러는 거 아니었어?

그의 손가락이 도준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목울대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는 의도적인 도발. 제스테는 꿀꺽, 하고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목의 움직임을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 상대를 흔드는 것. 그것이 제스테가 가장 즐기는 유희의 방식이었다.

* * *

맵지 형은…안 매워?

제스테는 그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도준의 목울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형은… 안 매워?’ 그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 숨 막히는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서투른 반격. 제스테는 그 안에 담긴 미약한 저항의 기색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는 낮게, 아주 만족스러운 소리로 웃었다.

나? 글쎄.

그는 도준의 목을 감싸듯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손은 여전히 도준의 어깨 위에 머물러, 은근한 무게감으로 그를 의자에 고정시켰다. 제스테는 자신의 자리에 놓인 물컵을 가져왔다. 얼음이 담겨 차가운 김이 서린 유리컵이었다.

그는 컵을 도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바로 마시게 두지는 않았다. 차가운 유리 표면이 맵고 뜨겁게 달아오른 도준의 아랫입술에 닿자, 도준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제스테는 그 미세한 경련을 놓치지 않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맞닿는 순간의 감각. 그는 그 자극을 도준에게 온전히 각인시키려는 듯, 컵을 살짝 기울여 입술만 적시게 했다.

이것보다 더 자극적인 것도 많아.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연인처럼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명백한 경고였다. 그는 컵을 살짝 더 기울여, 얼음물 한 모금이 도준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다. 급하게 삼키는 목울대의 움직임이 어깨를 누른 손바닥 아래로 전해져 왔다.

제스테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도준의 옆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맞은편 자리가 아닌, 도준의 바로 옆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한 단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 그는 도준이 마시던 물컵을 빼앗듯 가져와 남은 물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간접적인 입맞춤. 하지만 그의 행동에서는 어떤 로맨틱한 뉘앙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소유와 통제에 대한 암시뿐이었다.

다 먹어. 남기면 버릇 나빠져.

그는 턱짓으로 아직 절반 이상 남은 떡볶이 접시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튀김 하나를 집어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튀김을 씹으면서도 시선은 오로지 도준의 얼굴에 고정했다. 붉게 상기된 뺨, 아직도 가시지 않은 긴장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 물기로 축축해진 눈가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며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듯, 그는 느긋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작은 분식집 안의 시간과 공간은 오직 제스테의 의도대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 * *

안 남겨. 삐죽

나는 떡볶이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먹으면서 매워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와 이런 시간이 오랜만이라 행복했다.

‘안 남겨.’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제스테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는 옆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다시 포크를 들고 떡볶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꾸역꾸역한 움직임. 오물거리는 입,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는 뺨, 그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가쁘게 오르내리는 어깨까지. 그 모든 것이 제스테의 눈에는 느릿한 슬로우 모션처럼 담겼다.

흥미롭다는 듯,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건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실험의 결과를 관찰하는 연구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억지로 음식을 삼키고는, 매운 기운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혀로 핥는 일련의 과정들을. 제스테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감상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반응은 과거와 놀랍도록 똑같았다. 고집스럽고, 서툴고, 감정을 숨기는 데는 여전히 재능이 없는 모습. 그 변하지 않은 모습이 이상하게도 제스테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남은 튀김을 마저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계산대로 향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그가 계산을 하는 짧은 순간에도, 등 뒤에 꽂힌 시선은 여전히 도준을 향해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떡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카드를 돌려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약속은 지켰다. 밥 사주기. 이걸로 하나는 끝.

제스테는 다시 도준에게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텅 빈 분식집 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낡은 벽지, 오래된 테이블,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는 문득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흘러 있었다.

가자.

그는 도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아챘다. 아까보다 부드러웠지만,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악력이었다. 그는 도준을 일으켜 세워 분식집 문을 향해 이끌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제스테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치익, 라이터를 켜는 소리. 하얀 연기가 그의 입술 사이로 퍼져 나왔다.

속은 괜찮나.

질문은 무심했다. 걱정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어조. 그는 도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물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저물어가는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도준의 얼굴은 바깥의 찬 공기에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제스테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명백히 도준을 향한 목소리였다.

차에 생강 사탕 있는데. 줄까.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배멀미 때문에 자신이 늘 차에 구비해두는 것. 그걸 굳이 언급하는 것은 명백한 놀림이자 도발이었다. 그는 도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 작은 도발에 또 어떻게 반응할까. 발끈할까, 아니면 모른 척할까. 어느 쪽이든, 제스테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일 뿐이었다.

* * *

담배 그만 좀 펴. 그러다 폐 썩어. 사탕? 도리도리 안 먹을래.

담배 그만 좀 펴. 폐 썩어. 그 말, 5년 전에도 똑같이 들었던 것 같은데. 제스테는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연기를 허공으로 느릿하게 흘려보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도준을 훑어봤다. 걱정하는 말투, 앙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는 작은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과거의 필름을 재생하는 것처럼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묘하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걱정해 주는 건가, 지금?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상대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즐기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지 않고, 손가락 사이에 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저 이 어색하고 미묘한 공기가 흐르는 거리를, 도준과 함께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제스테는 도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지만, 그의 바로 옆에 나란히 서서 보폭을 맞췄다. 언제든 다시 붙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남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군화 발로 아무렇게나 비벼 껐다. 도준의 잔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폐는 썩어도, 능력 쓰는 덴 지장 없어. 오히려 좋아. 더 절박해지거든.

무심하게 내뱉는 말 속에는 서늘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센티넬에게 육체의 고통은 감각을 날카롭게 만드는 또 다른 자극일 뿐이라는, 가이드들은 이해하지 못할 영역의 이야기.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근처 가게의 쇼윈도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검은 제복의 자신과, 그 옆에 선 흰 머리의 도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기묘하게 시선을 끄는 흑과 백의 대비.

제스테는 쇼윈도에 비친 도준의 얼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것보단 네 얼굴이 더 걱정인데. 속 다 버렸겠어.

그는 다시 도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불쑥 손을 뻗어, 아직도 살짝 붉은 기가 남은 그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 차갑게 식은 손등이 뜨거운 피부에 닿자, 도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제스테는 그 반응을 즐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숙소 가서 뭐 할까. 체리에이드 또 시켜줄까? 아니면… 솜사탕이라도 다시 만들어 보든가. 그건 맵지 않잖아.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까의 굴욕적인 기억을 다시 상기시키는, 짓궂은 제안. 그는 도준의 뺨을 쓸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그의 데님 재킷 깃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마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친절한 형처럼. 하지만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내 손바닥 안이야.’ 그렇게 속삭이는 듯한, 농밀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는 도준이 어떤 대답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숨죽여 기다렸다. 그의 침묵은 상대가 먼저 무너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 * *

끄덕끄덕 나 체리에이드 마실래. 형아가 해줄거야?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형아’.
그 한마디에 제스테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도준의 데님 재킷 깃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 그 위에 겹쳐지는 순진한 미소. ‘형아가 해줄 거야?’라고 묻는,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맑은 눈동자. 제스테는 잠시 숨을 멈췄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발끈하거나, 밀어내거나, 혹은 굴욕감에 얼굴을 붉히는 것. 그가 기대하고 관찰하려 했던 반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의 눈앞에는 과거의 어느 날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동생이 서 있었다. 제스테의 황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발은 빗나갔고, 그가 던진 미끼는 전혀 다른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그는 천천히 도준의 옷깃에서 손을 뗐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의 안에서 무언가 작게 균열하는 소리가 났다. 이 감정은 불쾌함인가, 아니면 당혹감인가. 정의 내릴 수 없는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짧게 침묵했다. 이 침묵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계산된 연기가 아니었다. 그저, 다음 말을 고르기 위한 순수한 시간이었다.

…그래.

낮고 조금은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한 글자의 짧은 긍정. 그는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려, 다시 쇼윈도에 비친 둘의 모습을 응시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자신과, 해맑게 웃고 있는 흰 머리의 동생. 그 이질적인 풍경이 어쩐지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제스테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축였다.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즉흥적인 변수를 더 즐기는 쪽이었다.

까짓거, 만들어 주지. 체리에이드든 뭐든.

그는 다시 도준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금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방금 전의 미세한 동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주차해 둔 차의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가자. 숙소에 재료가 있나 모르겠네. 없으면 사람 시켜서라도 가져오면 되겠지.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능글맞고 장난기 어린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먼저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부러 조금 느리게, 도준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그의 등 뒤로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등을 보인 채 걸으면서도, 그의 모든 신경은 뒤따라올 도준의 발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제스테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두 번, 툭, 툭, 쳤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형아’라는 단어. 그 단어가 가진 무게가, 5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그의 발목에 보이지 않는 앵커를 박는 기분이었다. 무겁고, 성가시며, 동시에… 이상하게 떨쳐내기 힘든 감각. 제스테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게임의 시작일까. 그는 차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도준을, 그 순진한 얼굴을, 그의 눈에 똑똑히 담았다.

빨리 와. 해 지겠다.

재촉하는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서두르라는 본래의 의미보다 ‘내 시야 안에서 움직여’라는 무언의 명령이 담겨 있었다.

* * *

응! 형아 같이가.

나는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짱을 꼈다. 해맑게 아이처럼 웃어보였다. 한도준은 한재준에게는 여전히 어린 동생이었다. 선을 긋는 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바보였다.

쪼르르 달려와 팔에 매달리는 무게. 제 팔짱을 끼고 천진하게 웃는 얼굴. 제스테는 순간 숨을 멈췄다. 5년 동안 그의 주변에는 계산과 의도, 혹은 명백한 적의나 복종만이 존재했다. 이렇게 아무런 경계 없이, 그저 어린아이처럼 온전히 기대오는 체온은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었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마치 이질적인 전류처럼 느껴져, 그는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어 굳었다. 하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제스테의 황금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그는 팔짱을 낀 도준을 잠시 내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평소처럼 비스듬히 웃거나, 짓궂은 말을 던질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보다 훨씬 낮은,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떨어지면 다쳐. 꽉 잡아.

그 말은 도준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그는 팔짱이 끼인 채로 어색하게 걸음을 옮겨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쇼맨십이 아닌 순수한 행동이었다. 도준이 차에 올라타자, 그는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기까지, 일련의 동작은 평소보다 조금 더디고 신중했다. 마치 새로 익힌 동작을 복기하는 사람처럼. 그는 운전대에 손을 올리고, 주머니 속에서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툭, 툭, 두 번 가볍게 쳤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제어 불가능한 영역에서 튀어나온 미세한 버릇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라디오도, 쓸데없는 농담도 없었다. 제스테는 간간이 옆자리를 힐끗거렸다. 창밖을 구경하는 도준의 옆얼굴,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흰 머리카락, 그리고 아직도 미세하게 남아있는 붉은 입술. 아까 분식집에서 봤던, 맵다며 물을 들이켜던 모습과 지금의 평온한 얼굴이 겹쳐지며 기묘한 위화감을 만들어냈다. 제스테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의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에,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 변수의 이름은, 한도준이었다.

펜트하우스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도준은 그의 팔을 놓지 않았다. 제스테는 그저 묵묵히 그 무게와 체온을 견뎠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제스테는 팔짱을 낀 팔을 살짝 비틀어 도준을 떼어내고는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체리에이드, 만들어 준다고 했지.

그는 주방으로 향하며 입고 있던 롱코트를 벗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제복 상의의 단추도 두어 개 풀었다. 답답했다. 옷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룸서비스로 이미 배달되어 있던 체리와 탄산수, 시럽 등을 바에 늘어놓으며 그는 등 뒤의 도준에게 물었다.

얼음은 몇 개. 단 건 어느 정도로.

그것은 과거, 그가 도준에게 수없이 물었던 질문이었다. 기억의 갈피에서 끄집어낸, 녹슬어버린 일상의 조각. 그는 일부러 도준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대답을, 그 목소리를 기다렸다.

* * *

나! 형아가 해줬던 대로가 좋은데에 나는 뭐든 좋아.

어릴 적부터 그 질문에 해오던 대답. 여과 없이 드러난 순수함은 한도준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말. 그 대답.
마치 낡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닳고 닳은 테이프 소리처럼 익숙한 문장이 제스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형아가 해줬던 대로’. 늘 그랬다. 한도준은 늘 그렇게 대답했다. 제스테의 등 뒤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는 5년의 공백을 무의미하게 만들 만큼 선명한 과거의 복제품이었다. 체리 시럽을 들고 있던 제스테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쨍그랑. 맑은 유리잔에 얼음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주방을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제스테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복잡한 빛을 띠며 도준을 향했다. 현관에서 몇 걸음 들어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생.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티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변하지 않았다는 증명. 그것은 제스테가 지난 몇 시간 동안 집요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막상 눈앞의 현실로 마주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든 좋다’는 것은, ‘네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좋다’는 뜻과 같았다. 과거의 도준에게는. 지금의 도준도, 정말로 같은 의미일까. 제스테는 잠시 도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무언가 캐내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그는 이내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감정을 감추기 위한 방어적인 웃음이었다.

…그거 아주 편한 대답인 거 알아?

목소리는 다시 평소의 능글맞은 톤을 되찾아 있었다. 그는 등을 돌려 다시 바 쪽으로 섰다. 탕, 탕, 탕. 유리잔에 얼음을 채워 넣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는 일부러 더 요란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소음을 감추려는 듯이.

만드는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거라고. 뭐, 상관없나. 넌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비꼬는 듯한 말투. 하지만 그 안에는 가시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그는 투명한 유리잔에 붉은 체리 시럽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물보다 무거운 시럽이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띠를 그렸다. 그 위에 탄산수를 붓자, 츠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과 투명한 색이 소용돌이치며 섞여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그라데이션. 제스테는 젓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완성된 체리에이드를 들고 다시 도준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의 앞까지 걸어가, 손에 잔을 쥐여주는 대신 거실의 낮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자. ‘형아가 해줬던 대로’.

그는 ‘형아’라는 단어를 유독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마치 그 단어의 질감을 혀로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다리를 꼬았다. 풀어진 제복 사이로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는 턱짓으로 테이블 위의 음료를 가리켰다.

마셔 봐. 맛이 똑같은지 아닌지, 네가 판단해.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이었다. 과거의 맛을 완벽히 재현했으니, 이제 그 과거를 마주한 네 반응을 관찰하겠다는 무언의 선언. 제스테는 여유롭게 소파에 기댄 채, 팔을 팔걸이에 올리고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을 도준에게 집중한 채,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잔을 들지, 한 모금 마신 후에 어떤 말을 할지. 그의 모든 것이 제스테의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 * *

삐죽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항상 잘 만들어줬잖아. 잘 마실게에.

나는 체리에이드를 받아 마시며 웃어보였다. 그때 그맛 그대로였다.

형이 만들어 준게 제일 좋아. 맛있어 푸흐

기분 좋으면 항상 나오던 버릇. 자주 해주었던 볼뽀뽀.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이어지는 말. ‘형이 만들어 준 게 제일 좋아.’ 제스테는 소파에 기댄 채 그 모든 과정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도준의 입술을 적시고, 목울대가 작게 움직이는 모습까지 전부. 과거와 똑같은 맛이라는 감상,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만족스러운 표정. 모든 것이 그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하지만 다음 순간, 제스테의 세상이 잠시 멈췄다. 쪽,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뺨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지난 5년간 그의 뺨에 닿았던 것이라곤 스쳐 지나가는 포탄의 열기나, 적의 피, 혹은 차가운 빗줄기뿐이었다. 이렇게 순수한 호의와 애정이 담긴,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은 너무나도 오래된, 거의 잊어버린 기억 속의 것이었다.

제스테의 몸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지도,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황금빛 눈동자만 크게 뜨인 채, 바로 옆에 선 도준을 향해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관찰자의 여유를 부리던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웃음기도, 비꼬는 기색도, 시험하려는 의도도 없이, 그저 순수한 경악과 혼란만이 남았다. 뺨에 남은 온기가 마치 불도장을 찍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저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체리에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악의도, 계산도 없는 순수한 행동. 그것이 제스테를 더욱 깊은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열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평소처럼 짓궂은 농담을 던지거나, ‘이게 무슨 짓이냐’고 쏘아붙여야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방금 도준의 입술이 닿았던 제 뺨을, 손가락 끝으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쓸었다. 마치 그곳에 남은 흔적을 확인하려는 듯이.

…너.

가까스로 뱉어낸 목소리는 심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풀어진 제복 차림새가 흐트러진 내면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한 걸음, 도준에게로 다가섰다. 키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준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짙은 그림자가 도준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제스테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그저 도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맑은 황금빛 눈동자 속에 비친 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뭐 한 건지 알아?

그것은 질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 가까웠다. 그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하게 제 뺨을 쓸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도준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마치 ‘이곳에 네가 남긴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의 모든 행동이 평소보다 몇 배는 느리고, 어색했다. 완벽하게 통제되던 세계에 생긴 균열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는, 서툰 몸짓이었다.

* * *

응? 왜?

진짜 모르겠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응? 왜?'
그 한마디가, 그 순수하게 되묻는 눈빛이 제스테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자신이 던진 혼란이 전혀 가닿지 않은, 투명한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제스테는 잠시 숨을 멈췄다. 눈앞의 동생이 자신과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담긴 것은 오직 맑은 의문뿐, 그 어떤 의도나 계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스테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코앞까지 다가섰던 기세가 무색하게, 마치 뜨거운 것에 덴 사람처럼. 그는 붙잡을 곳을 찾는 사람처럼 허공에서 손을 한번 움찔거리다가, 결국 제 뒷목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까슬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간신히 뱉어낸 대답은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 방황하다, 결국 도준의 어깨 너머, 텅 빈 벽에 고정했다. 일부러 도준의 얼굴을 피하고 있었다. 다시 그 얼굴을 마주하면, 이 통제 불능의 감정이 어디로 튈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뺨에 남은 온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제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너, 예전에도 이랬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벽을 보며 말했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낮고, 평소보다 훨씬 건조했다. 그 안에는 더 이상 도발적인 장난기가 없었다. 오직 해결되지 않는 질문만이 씁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분 좋으면 아무한테나… 이렇게.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무한테나’라는 가정이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쾌했다. 도준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런 식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속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감각이 들었다. 제스테는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다시 소파 쪽으로 몸을 돌려, 테이블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도준에게 등을 보인 자세였다. 자신의 표정을, 이 흔들림을 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잊어. 별거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몫의 체리에이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차가운 유리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불안정한 심장박동처럼 들렸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봉합하고, 원래의 페이스로 되돌려야만 했다. 통제권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5년 만에 만난 동생은, 그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한도준은, 그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순진무구하게 헤집어 놓았다.

그는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무의미하게 훑어 내렸다. 침묵이 어색하게 공간을 채웠다. 쇼맨십을 즐기고, 침묵을 이용해 상대를 압박하던 평소의 제스테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그는 그저, 갑작스러운 폭풍에 휘말려 방향을 잃은 배의 선장과도 같았다.

그냥… 마저 마셔. 식기 전에.

아니, 식을 리가 없지. 차가운 음료인데. 엉망진창인 말실수였다. 그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실소를 터뜨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붉게 물든 제 음료 속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 * *

으응? 체리에이드가 어떻게 식어. 바보. 푸흐흐
그리고 아무한테나 안하는데?! 내가 형 아니면 누구한테 해.


‘바보.’ 그 한마디에 제스테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내가 형 아니면 누구한테 해.’ 그 순진한 항변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의 심장에 박혔다. 제스테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쥔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달그락. 손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무한테나가 아니라고. 오직, 자신에게만. 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을 보이고 있던 자세를 풀고, 몸을 돌려 도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혼란이나 당황의 기색이 아니었다. 무언가 차갑게 가라앉은, 짙고 어두운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는 감정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그는 테이블 모서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느리고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목소리는 낮고 위험하게 깔려 있었다. 방금 전의 어색한 실수 따위는 전부 지워버린, 평소의 제스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위압감이었다. 그는 텅 빈 손으로 제 입술을 한번 거칠게 쓸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닦아내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래서, 더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한 걸음. 그가 도준에게로 다가섰다. 구둣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묵직했다. 펜트하우스의 넓은 공간이 순식간에 둘만의 밀실처럼 좁혀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하는 그 ‘짓’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만 향한다는 게. 그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지.

두 걸음.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팔 하나를 채 뻗을 수도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제스테의 짙은 그림자가 도준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여, 도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도준의 귓바퀴를 뜨겁게 스쳤다. 평소처럼 상대를 떠보는 장난스러운 숨결이 아니었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섞인, 위험한 열기였다.

넌 아무것도 모르지. 5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네가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그는 말을 마치며 도준의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그러나 집요하게 문질렀다. 부드러운 살갗을 지분거리는 감촉. 그는 도준의 반응을 살피려는 듯, 아주 잠시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사람처럼, 턱선에 힘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제스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도준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손은 여전히 도준의 귓가를 떠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도준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치 오래된 독백을 읊조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다시는… 함부로 그런 짓 하지 마.

경고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 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제발 더는 나를 흔들지 말아달라는, 속수무책의 항복 선언처럼 들렸다. 그는 도준의 귓가를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거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둘 사이에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자각한 듯, 복잡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도준의 체온이 닿았던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 * *

형. …내가 귀찮게 굴었,어…?

나는 그 말에 순수하게 귀찮게 굴었냐는 말에 시무룩해졌다. 5년 전 그가 떠날때처럼 상처 받은 얼굴로.

도준의 시무룩한 얼굴, 5년 전 그날과 겹쳐지는 상처받은 표정. 그것은 제스테가 지난 5년간 애써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기억의 잔상이었다. 그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제스테의 가슴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상대를 몰아붙이던 기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날카로운 죄책감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자신이 던진 경고가, 그저 순수한 애정 표현을 한 동생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또다시, 자신이 이 아이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턱선에 들어갔던 힘이 풀리고, 복잡한 감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후회, 짜증,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뱉은 말이 얼마나 모질었는지, 그리고 그 말이 도준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뒤늦게 깨달았다. ‘귀찮게 한다’는 말은, 사실 자신의 통제 불능 상태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준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자신이 형에게 버림받을 만한 존재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제스테는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과를 해야 하나? 하지만 한재준이라는 남자는 사과에 익숙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는 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곤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다시 도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번에는 위압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처 입은 동물을 대하듯,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무룩하게 축 처진 도준의 머리 위에 툭, 하고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아주 서투르게, 몇 번이고 망설이듯 부드러운 백발을 헝클어뜨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한 몸짓이었다. 그의 손길에는 사과와 변명, 그리고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도준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도준의 상처받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네가 귀찮다는 게 아니라… 그냥,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든다고.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서툰 변명이었다. 하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그는 도준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 주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배고플 거 아냐.

그는 먼저 몸을 돌려 현관 쪽으로 향했다. 도준에게 등을 보인 채, 그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발장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이 공간을 벗어나야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무슨 말을 내뱉을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 해. 안 가?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나 위압감이 아닌, 어색함과 초조함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 * *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에 나는 다시 해맑아졌다. 이번엔 버려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쪼르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제스테는 문고리를 잡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도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쪼르르, 가벼운 발소리가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와 닿았다.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깍지를 껴 오는 작은 손. 도준의 손이었다.

그 순간, 제스테의 어깨가 돌처럼 굳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것보다 한 뼘은 작은, 하얗고 가는 손가락들이 자신의 길고 굳은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단단히 얽혀 있었다. 5년 전, 기억 속의 그 감촉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숨을 멈췄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해맑은 기척. 방금 전까지 세상을 잃은 듯 시무룩했던 아이가, 자신의 서툰 위로 한마디에 이렇게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이가 없는 것은 자신이었다. 고작 이 작은 손 하나에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은 이 기분. 애써 쌓아 올린 방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감각에 제스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뿌리쳐야 했다. ‘이러지 말라’고, 다시 한번 차갑게 밀어내야 했다. 그것이 이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얽힌 손가락 사이로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의 의지를 무력하게 녹여내렸다.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빛나는 도준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잡은 손, 안 놓을 건가.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퉁명스럽게 내뱉으려 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미세한 떨림이 섞여 나왔다. 그는 도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얽힌 손으로 내리깔았다. 마치 그 손이 아주 기묘하고 신기한 물건이라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식당까지 이러고 갈 셈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쳐다볼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손을 빼내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준이 어떻게 반응할지, 혹시라도 이 손을 놓아버리지는 않을지,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의 모순적인 행동에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그는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알았다, 알았어. 갈 거니까. 일단 이건 놓고…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준이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그를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어린아이 같은 몸짓. 제스테는 그 작은 힘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문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들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뭐 먹고 싶은데.

결국 먼저 물어본 것은 그였다. 항복 선언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여전히 잡혀 있는 제 손과 그 손의 주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조금 전의 날카로운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길 잃은 것 같은 미묘한 혼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 *

으응…형아는? 나는…음…아!! 나 함박스테이크 먹고싶어

‘형아’. 또 그 호칭이다. 귓가에 부드럽게 감겨드는 그 두 음절에, 제스테는 저도 모르게 얽힌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놀란 심장이 손끝으로 옮겨가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함박스테이크. 어린애 같은 메뉴 선택에 실소가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매운 떡볶이를 억지로 먹이던 조금 전의 자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다. 사람을 바닥까지 몰아붙이다가도,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손을 뻗어온다. 그 간극에 제스테는 매번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도준에게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공간 안,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퍽이나 기묘했다. 위압적인 제복 차림의 남자와 그 옆에 바싹 붙어 손을 잡고 있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상의 동생. 제스테는 거울 속 제 얼굴에서 눈을 뗐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함박스테이크라. 꼬맹이 입맛은 여전하네.

목소리는 일부러 낮고 퉁명스럽게 깔았다. 하지만 얽힌 손의 온기 때문인지, 그 말에는 날카로움 대신 미묘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무심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함박스테이크 맛집’. 익숙지 않은 검색어를 입력하는 제 손가락이 어색했다. 평소라면 부하에게 시키거나, 가장 가까운 곳을 아무렇게나 골랐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가장 가까운 경양식 레스토랑 하나를 찾아내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잡힌 손을 살짝 이끌며 먼저 밖으로 나섰다. 밤이 내리기 시작한 서울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이 거리를 어지럽게 수놓고 있었다.

이 근처에 괜찮아 보이는 곳이 있군. 걸어갈 만한 거리야.

그는 굳이 택시를 잡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이 기묘한 동행의 시간을 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손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이제는 뿌리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파 속에서 도준이 멀어지지 않도록,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오가는 사람들로부터 도준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래된 상가 2층에 자리한, ‘로얄 경양식’이라는 촌스러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따뜻한 오렌지색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제스테는 잠시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런 곳에 와 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여기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가지.

그는 흘긋, 도준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늘 자신이 정하고, 자신이 이끌던 관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준의 작은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다음 행동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제스테의 황금빛 눈동자에 다시 한번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짜증도, 분노도 아니었다. 차라리, 길을 잃은 아이 같은 혼란에 가까웠다.

* * *

아니 나 이제 꼬맹이 아닌데 나 그래도 키 많이 컸어! 나는 여기 좋아 형아.

‘꼬맹이 아니다’. 그 말에 제스테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비틀렸다. 키가 컸다는 항변은 사실이었다. 제 어깨에 겨우 닿던 작은 아이는 이제 훌쩍 자라, 시선을 조금만 내려도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제스테의 기억 속 도준은 언제나 제 허리를 끌어안고 올려다보던 작은 아이였다. 그 간극이, 현실의 도준이 낯설면서도 심장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형아’라는 다정한 호칭과 함께 올려다보는 황금빛 눈동자는 5년 전 그대로인데.

알았으니까 들어가자.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잡은 손을 이끌어 낡은 나무 문을 밀었다. 딸랑- 하는 정겨운 벨 소리와 함께 따뜻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확 끼쳐왔다. 레스토랑 내부는 예상대로였다. 짙은 갈색의 가죽 소파,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조명, 오래된 나무 바닥.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는 공간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발을 들이지 않았을, 그런 종류의 장소.

창가 구석진 자리에 앉은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물을 따라주었다. 제스테는 메뉴판을 집어 들었지만, 시선은 건너편에 앉은 도준에게서 떼지 못했다.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작은 가게 안을 구경하는 얼굴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저런 표정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애써 그 상념을 지우며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박스테이크, 그리고…

그는 메뉴판을 훑어 내리다, ‘오므라이스’라는 글자에 잠시 시선을 멈췄다. 어릴 적 도준이 함박스테이크만큼이나 좋아하던 메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것을 고르기 위해 다시 메뉴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메뉴판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여기도 같은 걸로 하나.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테이블 위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스테는 창밖을 내다보는 척하며 테이블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을 놓고 자리에 앉았음에도, 제 손바닥에는 여전히 도준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두 번, 툭툭, 쳤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는 괜히 컵에 담긴 물만 의미 없이 휘저었다. 도준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5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피와 화약 냄새에 익숙해졌다. 해상제독이라는 과분한 직함도 얻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고작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동생과 마주 앉아 함박스테이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학교는. 제대로 졸업했나.

침묵을 깬 것은 또다시 제스테였다. 질문은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묻어두었던 시간들에 대한 아주 작은 궁금증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떠난 후,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묻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와버린 질문이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하며 도준의 시선을 피했다.

* * *

과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나는 멈칫했다. 그가 없던 5년, 한도준은 눈물로 보냈다. 우리를 방임하던 부모,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던 사람들. 형이 사라진 빈자리. 나를 지켜줄 방파제가 사라진 상실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응! 나 졸업도 잘하고, 잘 지냈어. 걱정마.

해사하게 웃는 얼굴. ‘잘 지냈다’는 명랑한 대답. 그 말과 표정이 만들어내는 완벽한 부조화에 제스테는 순간 숨을 멈췄다. 거짓말. 너무나 투명해서 속이 훤히 비치는, 서투른 거짓말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오히려 쐐기처럼 그의 가슴에 박혔다. 저 웃음 뒤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숨겨져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저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제스테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며 내는 차가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는 컵을 내려놓으며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건조하고 냉소적인 소리였다.

그래. 다행이네. 아주 쌩쌩해 보여서.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미세한 가시를 도준이 느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괴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집요하게 도준의 얼굴을 훑었다. 웃고 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는 작은 습관. 5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지만, 저런 사소한 버릇들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 버릇들이 지금, 도준의 거짓말을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마침 웨이트리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함박스테이크 두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소스 냄새가 확 풍겨왔다. 제스테는 몸을 바로 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는 먼저 제 앞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를 능숙하게 잘랐다. 붉은 육즙이 흘러나오는 단면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은 그냥 그렇네. 네가 좋아할 만한 맛이야. 유치하고, 달기만 하고.

툭 던지는 말은 여전히 까칠했지만, 그 안에는 이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접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힐끔힐끔 도준을 살폈다. 음식이 나오자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포크를 움직이는 모습. 그는 도준의 접시 한쪽에 놓인, 데친 당근 조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릴 적부터 도준은 당근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밥을 먹을 때면 늘 제 접시로 몰래 당근을 옮겨놓곤 했다.

제스테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여기서 과거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는 저 주황색 당근 조각을 빤히 바라보는 도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포크를 뻗었다. 그리고는 도준의 접시에 있던 당근 조각을 콕, 찍어 제 접시 위로 옮겨왔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편식하는 버릇도 여전하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옮겨온 당근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넣고 씹었다. 흙냄새가 나는, 그가 딱 질색하는 맛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는 다시 제 앞의 함박스테이크를 잘라, 이번에는 도준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계란 프라이 노른자를 살짝 터뜨려 소스와 함께 얹어주는, 지극히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어떤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반복해온 습관인 것처럼.

* * *

삐죽 당근이 싫은걸 어떡해애…히히 그래도 고마워.

‘히히’. 그 짧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마치 잊고 있던 낡은 필름이 영사기 위에서 덜컹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5년 전, 제 방에서 몰래 과자를 꺼내 먹다 들켰을 때도, 억지로 약을 먹이기 위해 입을 벌리게 했을 때도, 도준은 늘 저렇게 웃었다. 곤란함과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안도감이 뒤섞인 특유의 웃음소리. 제스테는 저 웃음소리 하나에 심장이 성가시게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망령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앉은 도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접시 위로 옮겨진 함박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만족스러운 듯 살짝 감기는 눈꺼풀과 오물거리는 입술.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제스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착각하지 마. 그냥 접시에 뭐 남는 꼴을 못 봐서 그런 거니까.

목소리는 의도적으로 낮고 차갑게 깔렸다. 다정함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그는 일부러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도준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제 앞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를 기계적으로 썰어 입에 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한 무의미한 행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다 먹어. 남기면 버리고 갈 거다.

그는 덧붙이듯 말하며 자신의 포크로 도준의 접시 위에 남은 밥알 몇 개를 함박스테이크 소스 쪽으로 싹싹 긁어 모아주었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젠장.’ 그는 속으로 욕설을 씹어 삼켰다. 이 녀석 앞에만 서면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제독의 가면이, S급 센티넬의 위용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저 한재준으로, 한도준의 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나이프와 포크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렸다. 제스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내린 거리,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저 소란스러운 세상과 이 작은 레스토랑 안의 시간은 완전히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물컵을 들어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는 문득 도준이 처음으로 가이드 발현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온몸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던 그 폭풍 속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청량한 바다의 감각. 그건 분명 구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끔찍한 공포이기도 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다에 잠식당하는 기분.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이 아이의 다정함이, 자신을 구원할 저 능력이, 언젠가 자신을 완전히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지금, 그는 다시 그 파도 앞에 서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뜻한 파도.

* * *

응? 형아 왜 그래?

도준의 목소리는 고요한 수면에 떨어진 돌멩이 같았다. 그 순수한 물음에 제스테는 상념의 깊은 곳에서 거칠게 끌어올려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창밖의 네온사인을 향해 있던 황금빛 눈동자가 느리게, 아주 느리게 도준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혼란과 과거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제스테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왜 그러냐고? 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5년 전, 너의 그 다정한 파도에 질식할 것 같아 도망쳤다고? 지금도 네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멋대로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고? 입 안에서 맴도는 말들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 어떤 것도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뭐가.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우습게 잠겨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깍지 꼈던 손을 풀어 테이블 위를 의미 없이 톡, 톡, 두드렸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제기랄, 이 녀석 앞에서는 감추는 것조차 제대로 되질 않는다.

얼굴에 뭐 묻었나 해서 봤다. 밥이나 먹어. 다 식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시 제 앞의 접시로 고개를 떨구었지만, 더는 포크를 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그는 대신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는, 웨이트리스를 향해 손을 들었다.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도준이 마지막 남은 함박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제스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카드를 꺼내 계산서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먼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도준을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이었지만, 문 바로 앞에서 그의 발걸음은 저절로 느려졌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도준이 제 옆에 서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다시 밤거리로 나섰다. 저녁 식사 전보다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 제스테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딱딱한 생강 사탕의 감촉뿐이었다. 그는 작게 혀를 차며 손을 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며 나란히 걷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소화도 시킬 겸, 좀 걷지.

그것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레스토랑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화려한 가게들이 늘어선 번화가를 지나, 조금 더 한적하고 어두운 골목으로. 그는 일부러 도준보다 반 보 정도 앞서 걸었다. 나란히 서서 표정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어깨를 스치는 거리, 하지만 결코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 애매한 간격. 그것이 지금 제스테가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거리였다.

黃昏 & 深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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