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 소리에 고개를 든 지부장 K는 피곤한 얼굴로 도준을 보며 짧게 말했다.
“앉아.”
응접용 의자 건너편, 먼저 자리 잡은 남자.
코드네임 제스테.
광택 나는 제독모가 탁자 위에 무심히 올려져 있었고, 검은 롱코트 자락이 길게 흘러내렸다. 날카로운 황금빛 눈동자가 스윽 고개 들어 맞춰졌다. 순간, 무심히 웃음이 번졌다.
“서울 본부는, 낭만이 좀 없네.”
그는 가죽장갑 낀 손가락을 탁자 위에 두 번 툭 치며 말을 잇는다.
“뭐, 이제 재미는 좀 생기려나.”
옆에서 수신기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새 센티넬 페어링 신호를 띄웠다. 제스테는 검지를 들어 공중에 선을 그었다가 스윽 내리듯 손을 내리며 장난처럼 눈을 가늘게 했다.
“보자고. 재미있게 맞춰줄 수 있을지.”
* * *
오랜만에 만난 형, 5년의 부재. 그리움으로 점철 되었던 마음은 그를 향한 애증이 되었고 나는 수신기를 보고 지부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오니, 어딘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나의 형. 한재준이 보였다. 나는 표정을 유지한 채 담담히 말을 올렸다.
…제스테, 센티넬님의 담당 가이드가 된 한도준입니다.
제스테는 의자에 기댄 채,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도준의 목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가르자,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비틀리며 올라갔다. 황금빛 눈동자가 느긋하게 도준의 얼굴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마치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을 감정하듯, 집요하고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지부장 K가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뒤적였지만, 제스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86cm의 큰 키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도준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구둣발 소리가 딱, 딱, 하고 선명하게 울렸다. 제스테는 도준의 바로 앞,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천천히 올라와, 데님 재킷 위로 드러난 도준의 흰 나시티 어깨 부분을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옷감을 쓸어내리듯 매만지며, 마치 먼지를 털어주는 것 같은 태연한 제스처를 취했다.
하아, 제스테 센티넬님이라.
나른하게 웃는 목소리. 가까운 거리 탓에 그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어릴 적 들었던 목소리보다 한층 굵고 깊어진 톤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도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 속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부르니까 꼭 남 같네. 안 그래, 도준아?
‘도준아’ 하고 부르는 다정한 호칭과는 달리,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도준의 반응 하나하나를 수집하려는 듯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제스테는 슬쩍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체향이 희미하게 끼쳐왔다.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와 가죽 냄새가 섞인 향.
5년 만인가. 많이 컸네, 우리 동생.
그는 다시 한번 웃었다. 이번에는 송곳니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반가움보다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그것과 더 닮아 있었다. 제스테는 도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던 손을 떼고, 이번엔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시선을 피할 수 없도록 고정시키려는 듯한,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손길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나의 ‘전담 가이드’님.
‘전담 가이드’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며 속삭였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도준의 눈을 똑바로 꿰뚫었다. 오랜 부재 끝에 마주한 형제. 그러나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재회의 애틋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팽팽한 긴장감과 알 수 없는 의도가 가득한, 오직 제스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불쾌하고도 매력적인 분위기였다.
* * *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5년의 부재 후 재회는 눈물겨운 감동 재회가 아니었다. 서로를 상처주고 떠나버린 후 만남이라 그런지 이 상황을 도망치고 싶어졌다.
제스테는 도준의 턱을 붙잡았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 짧은 대답, 건조하고 사무적인 톤. 마치 애써 감정을 지워낸 듯한 얼굴을 마주하자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재미있다는 듯, 혹은 지루하다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대신, 오히려 몸을 더 기울였다. 도준의 귓가에 거의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도망치고 싶어 하는 얼굴인데.
속삭임은 뜨거운 숨결과 함께 흩어졌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는 일부러 도준의 목덜미 근처에서 숨을 느리게 내쉬며 반응을 살폈다.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 긴장으로 굳는 어깨의 미세한 떨림까지 전부. 만족스럽다는 듯, 제스테는 천천히 상체를 바로 세웠다. 시선은 여전히 도준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그는 손을 들어 이번엔 도준의 데님 재킷 깃을 매만졌다. 구겨진 부분을 바로잡아주는 척, 손가락으로 깃 안쪽, 쇄골이 희미하게 드러난 맨살 근처를 느릿하게 쓸었다.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이 피부에 선명하게 닿았다.
여전하네. 무의식적으로 입술 깨무는 버릇.
나른한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5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는 도준의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에 도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제스테는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예리한 관찰력을 과시하고, 상대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즐길 뿐이었다.
“큼, 큼!”
그때까지 둘 사이의 팽팽한 공기를 지켜보던 지부장 K가 참다못해 커다란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서류 뭉치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한재준… 아니, 제스테 센티넬. 페어링된 가이드에게 장난은 그만하지. 여긴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곳이 아니야.”
지부장의 딱딱한 제지에 제스테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도준의 옷깃에서 손을 떼고는, 한 걸음 물러나며 지부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아아, 실례. 오랜만에 본 동생이라 반가워서 그랬지. 안 그런가, ‘팀원’?
‘팀원’이라는 단어를 씹듯이 내뱉으며 그가 다시 도준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는 탁자 위에 두었던 자신의 제독모를 집어 들고는,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이제부터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지. 그럼, 우리 숙소는 어디로 배정됐지, 지부장? 이왕이면 낭만 있는 곳으로 부탁하는데. 바다가 보이는 곳은 빼고. 알다시피 난 배멀미가 심해서.
천연덕스러운 요구였다. 해상제독이라는 작자가 태연하게 배멀미를 핑계 대는 모습에 지부장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제스테는 그 반응을 즐기며, 삐딱하게 제독모를 머리에 걸쳐 썼다. 챙 아래로 드리운 그늘이 그의 표정을 반쯤 가렸다.
가자, 한도준 가이드. 우리 ‘팀’의 첫 임무는 숙소까지 무사히 길을 찾는 게 되겠네. 잘 리드해봐. 네 전문이잖아, 그거.
그는 먼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오직 도준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앞으로 재미있어지겠어. 그렇지?
* * *
하아. 가죠.
도준의 짧고 체념 섞인 대답에, 제스테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잠시 멈칫했다. 어깨너머로 슬쩍 돌아본 그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늘진 제독모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만족스럽게 반짝였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젖히고는, 도준이 먼저 나가도록 턱짓으로 가볍게 복도를 가리켰다. 마치 친절을 베푸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 안에는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서울본부의 복도는 길고 고요했다. 간간이 지나치는 요원들이 흘끗, 해상제독의 옆에 선 낯선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제스테의 위압적인 기세에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는 일부러 도준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걸었다.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한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준의 긴장감을 즐기는 듯했다. 딱, 딱, 울리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자, 제스테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도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 문에 비스듬히 기댔다. 광택이 도는 차가운 금속에 그의 검은 롱코트가 스쳤다.
S급 가이드 숙소는 이쪽 라인이 아닌데.
나른한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그는 도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특별히 ‘우리’ 숙소는 최고층 펜트하우스로 배정받았거든. 전망이 기가 막히지. 물론, 바다는 안 보여. 내 취향을 아주 잘 아는군, 지부장은.
그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말투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은근한 과시와 함께, ‘너는 이제 나와 묶였다’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제스테는 먼저 안으로 들어서며 손짓했다.
타.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엘리베이터 안, 좁은 공간에 단둘이 남게 되자 공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제스테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도준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섰다. 그의 체향이 한층 짙게 느껴졌다. 아쿠아 머스크향이 섞여들며 기묘한 향을 만들어냈다. 그는 힐끗, 도준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굳게 다물린 입술,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 5년 전, 앳되고 여렸던 얼굴 위로 어렴풋이 어른의 선이 겹쳐 보였다.
제스테는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가 싶어 도준의 어깨가 굳는 순간, 그의 손가락은 도준의 뺨을 스쳐 지나가 벽에 박힌 층수 버튼을 눌렀다. 가장 꼭대기 층, ‘PH’.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버튼을 누른 뒤에도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이 도준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머물렀다. 그의 숨결이 귓바퀴에 닿았다.
긴장했네.
사실을 확인시키는 낮은 속삭임.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그 울림이 도준의 고막을 직접적으로 파고들게 만들었다. 그는 도준의 반응을 살피며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제독모의 각도를 고쳐 썼다.
숙소에 가면 짐부터 풀고. 네가 좋아하는 체리에이드라도 시켜줄까? 솜사탕은… 요즘도 좋아하나 모르겠네.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그는 도준의 지난 5년을 전부 들여다본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과거의 기억을 헤집었다.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상승하는 동안, 제스테는 흥미로운 눈으로 도준을 관찰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길게 이어졌고, 그 침묵 속에서 먼저 무너지는 쪽이 누구일지는 명백해 보였다.
* * *
좋아합니다. 솜사탕
내 대답은 간결했고 담담했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고서 나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숙소 현관문에 카드키를 가져다 대고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짐이 있는 내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낡고 헤진 하얀 토끼인형을 꺼내 침대 머리맡에 가지런히 두었다.
제스테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먼저 쌩하니 걸어가 버리는 도준의 뒷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예상보다 더 쌀쌀맞은 반응이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옅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작은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우아한 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도준이 카드키를 대고 안으로 사라진 펜트하우스 현관문은 저절로 닫히지 않고 느리게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거실의 광활함이 그를 맞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고급스럽지만 온기 없는 공간. 제스테는 제독모를 벗어 근처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롱코트의 단추를 풀며 천천히 거실을 가로질렀다. 도준이 들어간 방문은 닫혀 있었지만,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소리 없이 그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고리를 잡는 대신, 문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굳이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동생의 행동 패턴이 눈에 선했다. 낯선 공간에 가면 가장 먼저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가장 아끼는 것부터 꺼내어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 하는 버릇. 그게 무엇일지도.
그는 피식,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조소 같기도, 혹은 어렴풋한 그리움 같기도 했다.
그거, 아직도 안 버렸네.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도 충분히 안까지 들릴 법한 크기였다. 그는 일부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에서 등을 떼고는 거실 소파 쪽으로 향했다.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을 던지듯 기대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궤었다.
잠시 후,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제스테는 힐끗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체스 게임이라도 하듯, 다음 수를 기다렸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관망하며 판을 짜는 것에 익숙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 네가 앞으로 살 집인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하고.
그의 목소리는 태평하고 여유로웠다. 마치 방금 전의 도발적인 언행은 전부 잊었다는 듯, 친절한 형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단말기를 들어 능숙하게 조작했다. 곧이어 그의 주문이 이어졌다.
룸서비스. 여기 펜트하우스. 체리에이드 두 잔, 아주 차갑게. 그리고… 솜사탕 기계 있으면 하나 올려보내 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오고.
전화를 끊은 그는 단말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깍지 낀 손을 머리 뒤로 받치고, 소파에 거의 눕듯이 몸을 기댔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닫힌 방문을 향해 있었다. 그 눈에는 즐거움과 함께, 무언가를 시험하는 듯한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기다렸다. 도준이 저 문을 열고 나올 때,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것이 지금 그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 * *
나는 결국 짐을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주방으로 향해 물을 마셨다.
도준이 마침내 방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소파에 반쯤 누워 있던 제스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고개만 살짝 돌려 도준의 동선을 쫓았다.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주방으로 향하는 쌀쌀맞은 옆모습.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단호한 걸음걸이에서 애써 태연하려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쿵, 하고 냉장고 문이 닫히고, 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거실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스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 물을 마시는 도준의 목울대가 작게 오르내리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얇은 흰 나시티 위로 드러난 목선과 쇄골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5년 전, 앳되기만 했던 소년의 몸에 어른의 선이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변화가 낯설면서도,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도준이 컵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순간까지도, 제스테는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마치 거실 전체가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공간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도준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 거실 한구석에라도 자리를 잡을 것인지, 그 선택을 흥미롭게 관망했다.
딩동-.
그때, 정적을 깨고 현관의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였다. 제스테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직접 문으로 향하는 대신,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선 채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는 도준을 향해 턱짓했다.
네가 좀 받아. 손님 왔잖아.
명령이라기엔 너무나 태평하고, 부탁이라기엔 거절할 수 없는 어조였다. 그는 다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덧붙였다. 뻔뻔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피곤하네.
그는 눈을 감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잠이라도 청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팔 아래로 드러난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준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보는 것은, 그에게 있어 무료함을 달래는 가장 좋은 유희였다. 이 넓은 펜트하우스 안에서, 이제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상은 이런 식의 미묘한 힘겨루기가 될 터였다.
잠시 후, 도준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현관문이 열리고, 룸서비스 카트를 끄는 직원의 목소리와 도준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제스테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거실로 카트가 들어오는 소리, 체리에이드가 담긴 유리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 그리고… 거대한 솜사탕 기계가 한쪽에 자리 잡는 소리까지.
직원이 돌아가고 현관문이 조용히 닫혔다. 이제 공간에는 다시 두 사람뿐이었다. 제스테는 그제야 팔을 내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망연히 솜사탕 기계 앞에 서 있는 도준에게로 향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그 뒷모습을, 제스테는 말없이 응시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는 걸음으로 도준의 등 뒤로 다가갔다.
바로 등 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멈춰 섰다. 도준의 어깨가 순간 흠칫,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스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준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솜사탕 기계의 전원 스위치를 켰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 중심부의 히터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만들어 봐. 옛날에 곧잘 했잖아.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다정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도망칠 곳 없는 이 공간에서, 도준을 과거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는 가장 효과적인 올가미였다. 그는 도준의 귓바퀴를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온몸으로 그 긴장감을 느끼며 기다렸다.
* * *
…하아. 그만해. 형.
결국 졌다. 이런식으로 선을 긋는다 한들, 내가 아는 한재준은 계속 이럴게 분명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솜사탕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와 종종 함께 먹었던 그 솜사탕을 말이다.
도준의 입에서 마침내 터져 나온 그 한마디, ‘형’. 그 단어는 5년의 세월을 비집고 제스테의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체념이 섞인 한숨 소리와 함께 들려온 그 호칭에, 제스테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고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승자의 미소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준의 어깨너머로, 기계 안에서 설탕이 녹으며 가느다란 실처럼 피어오르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윙, 하는 기계음이 거실의 침묵을 채웠다. 달콤하고 끈적한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제스테는 도준의 등 뒤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거의 몸이 닿을 것처럼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도준의 몸을 온전히 감쌌다. 곁눈질하지 않아도,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동생의 목덜미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전부 느껴졌다. 나무 막대를 쥔 도준의 손놀림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서툴지만,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솜사탕이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동안, 제스테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조금 거리를 둔 채,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감상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솜사탕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있는 도준의 하얀 옆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표정하려 애쓰는 얼굴, 무의식적으로 깨물었다가 혀로 축이는 입술. 모든 것이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 녀석은 여전히 알기 쉬웠다. 그래서 더 가지고 놀고 싶어졌다.
마침내, 제법 그럴듯한 모양의 솜사탕이 완성되었다. 도준은 기계의 전원을 끄고, 완성된 솜사탕을 든 채 돌아섰다. 제스테와 시선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살짝 숙인 채였다. 제스테는 그 솜사탕을 받아들 생각은 하지 않고, 대신 룸서비스 카트에 놓인 체리에이드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얼음이 부딪히며 쨍, 하는 맑은 소리를 냈다.
잘했네. 역시 내 동생이야.
칭찬이었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소유욕이 배어 있었다. 그는 체리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솜사탕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도준에게 턱짓했다.
먹어. 널 위해 시킨 거잖아.
그의 말은 거절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다. 도준이 마지못해 솜사탕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제스테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도준이 갓 베어 문 솜사탕의 반대편을, 망설임 없이 입에 물었다. 시선은 정면으로 도준을 향한 채였다.
훅, 하고 제스테의 체향과 숨결이 도준의 얼굴을 덮쳤다. 눈과 눈 사이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달콤한 설탕 덩어리를 사이에 둔, 아슬아슬한 대치. 제스테는 천천히 솜사탕을 녹여 삼키며, 도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맛있어?
나직하게 물어오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부드러웠다. 그는 도준의 입술 바로 옆에 묻은 작은 설탕 조각을 발견했다. 하지만 떼어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기울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도망갈 틈도, 피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그는 이 숨 막히는 게임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 * *
끄덕끄덕 응. 여전히…맛있네.
나는 그런 그의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 지 눈치도 채지 못한채 담담하게 말했다. 순진하게 그저 그를 바라봤다.
도준의 대답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흔들림 없는 황금빛 눈동자는 그저 눈앞의 형과,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솜사탕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스테가 의도한 아슬아슬한 긴장감, 숨 막히는 거리감 같은 것은 그 순진한 시선 앞에서 맥없이 녹아내렸다. 예상했던 당황이나 분노, 혹은 수치심 어린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스테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도준의 입술 바로 옆, 그 작은 설탕 조각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길을 잃었다. 픽, 하고 입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김이 샌다는 듯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하는 기색이 섞인 실소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리며 솜사탕에서 입술을 뗐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달콤한 장벽이 사라지고, 흐트러진 솜사탕의 결 사이로 서로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럼 다행이고.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제스테의 손이 올라왔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여, 도준의 입가에 묻어 있던 설탕 조각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의도치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난 설탕의 감촉과 도준의 부드러운 피부결이 동시에 느껴졌다. 제스테는 아무렇지 않게 그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쪽, 하고 빨았다.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유려했다.
단 걸 먹었으면, 짠 것도 먹어야지. 배고프지 않아? 5년 만에 만난 동생한테 밥 한 끼는 사줘야지, 내가.
그는 도준의 손에 들린 솜사탕 막대를 가볍게 빼앗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도준의 손목을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잡아끌었다. 그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현관 쪽, 펜트하우스를 나서는 방향이었다. 붙잡힌 손목을 통해 그의 단단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뭐해. 가자.
아무런 설명도, 목적지에 대한 예고도 없었다. 그저 가자는 한 마디뿐이었다. 마치 5년 전, 아무렇지 않게 동생의 손을 잡고 동네를 돌아다녔던 그 시절처럼.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때의 다정한 형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려는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도준의 순진한 반응이 그의 계획을 살짝 틀어놓았을지는 몰라도, 게임의 주도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제스테는 잡고 있던 도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대신 그는 도준의 어깨에 팔을 툭 걸치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데님 자켓 아래로 느껴지는 마른 몸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는 도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서울 구경 시켜줄게. 많이 변했거든. 너도, 여기도.
그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변해버린 도시, 변해버린 관계, 그리고 변해버린 동생에 대한 이야기. 그는 도준이 그 숨은 의미들을 알아채든, 알아채지 못하든 상관없다는 듯 태평한 미소를 지었다. 딩,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제스테는 도준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닫히는 문 안으로, 펜트하우스의 불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 * *
뭐 먹을건데? 아니 그리고…서울은 내가 형보다 더 잘 알지 않나…?
뜻하지 않게 나온 본심. 한도준은 여전히 한재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말투. 나는 과거의 그 어린 동생처럼 순진하게 그를 바라봤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동안, 제스테는 어깨에 올린 팔을 거두는 대신 오히려 더 깊숙이 도준을 끌어당겼다. 익숙한 아쿠아 머스크 향이 훅 끼쳐왔다. 그건 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제 동생의 냄새였다. 도준의 순진한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을 낮게 울렸다.
그래? 그럼 네가 더 잘 아는 서울은 어떤 곳인데.
그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도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벽의 차가운 금속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기묘하게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흑과 백, 그림자와 빛처럼. 제스테는 도준의 목덜미와 귓바퀴로 시선을 옮겼다. 긴장한 기색 없이, 그저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의 얼굴은 과거의 어느 날에 멈춰있는 것 같았다. 그 순수함이 제스테의 안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가이드해 봐, 그럼. 오늘의 서울은 네가 안내하는 걸로.
딩, 하는 도착음과 함께 1층에서 문이 열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로비의 환한 불빛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두 사람을 덮쳤다. 제스테는 망설임 없이 도준의 어깨를 감싼 채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큰 키와 위압적인 제복 차림 때문에 사람들은 슬금슬금 길을 터주었다. 그는 마치 제 세상을 활보하는 왕처럼 태연했다.
본부 건물을 나서자, 늦은 오후의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하늘은 이미 옅은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퇴근 시간의 도로는 차들로 붐볐다. 제스테는 잠시 멈춰 서서 소란스러운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도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동생. 난 지금 아주 배가 고픈데.
그는 ‘동생’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호칭은 다정하면서도 동시에 족쇄처럼 들렸다. 그는 도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품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고,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하얀 연기를 허공으로 길게 뿜어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담배 연기 너머에서 여전히 도준을 향해 있었다.
그의 태도는 명백한 시험이었다. 네가 아는 서울. 네가 이끌어 봐. 그의 모든 행동은 도준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척하면서, 결국 그 선택마저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도준이 어떤 대답을 하든, 그는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머뭇거린다면, 자신이 다시 주도권을 쥐고 흔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제스테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이 순진한 동생이 과연 어떤 ‘서울’을 자신에게 보여줄 것인지. 과거의 추억이 담긴 장소일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곳일까.
그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툭, 하고 한 번 털었다. 재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시선은 도준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향했다. 망설이는 건지, 고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표정을 수집하듯 관찰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게임은 자신에게 유리해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 *
담배 금지. 삐죽 형, 뭐 먹고싶은거 있어? 으음…아! 우리 예전에 자주 갔던 곳 갈까? 나 거기 혼자 종종 갔었는데 안 변했어
도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담배 금지’라는, 지극히 동생다운 잔소리에 제스테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마치 5년이라는 시간의 벽이 잠시 허물어지고, 기억 저편의 익숙한 장면이 재생되는 듯한 착각. 삐죽 내민 입술과, 그럼에도 형의 의사를 묻는 순진한 질문의 기묘한 조화. 제스테는 대답 대신,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 느릿하게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타들어 가는 담배의 끝을 응시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 하, 하고 짧게 내뱉은 연기가 도준의 얼굴 근처에서 흩어졌다.
금지라. 네가?
나직하게 되물으며, 그는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군화 발로 비벼 껐다. 도준의 명령을 따르는 모양새였지만, 그 과정은 철저히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짧은 순간마저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과시였다. 이어서 들려온 ‘예전에 자주 갔던 곳’이라는 말에, 그의 시선이 조금 더 깊어졌다. 혼자서도 종종 갔었다는 덧붙임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금 담배를 껐던 바로 그 발을 들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도준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코앞까지 다가선 그는 고개를 숙여 도준의 얼굴을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의 넓은 어깨에 막혀, 도준의 시야에는 오직 제스테의 얼굴과 그 뒤로 번지는 역광뿐이었다.
안 변했다고.
속삭이듯 내뱉는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그는 도준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지, 그곳도, 그리고 너도.
…그래. 가자, 그럼. 네가 안내해.
한참의 침묵 끝에, 그는 몸을 일으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시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바람과 도시의 소음이 끼어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태연한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도준의 순진한 제안이 불러일으킨 작은 파문이 일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혹은 잊으려 했던 과거의 좌표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도준이 혼자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멋대로 상상했다. 그 상상은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자극했다.
네가 아는 서울이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길 잃고 울지나 마라.
툭 던지는 말은 여전히 장난기 어리고 비꼬는 투였지만, 그 속에는 도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명백한 의사가 담겨 있었다. 그는 먼저 등을 돌려 인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도준이 따라와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서기를 기다리는 듯한, 암묵적인 배려 혹은 계산된 여유였다. 퇴근길 인파와 수많은 차들, 어지러운 간판 불빛 속으로 그의 검은 제복이 망설임 없이 섞여 들어갔다. 그 뒷모습은 도준에게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낯설었다.
* * *
내가 울면 이제는 다시 형이 닦아줄거 아니야? 나는 …좋은데. 손 잡아도 돼?
제스테는 걷고 있던 걸음을 멈췄다. 앞서 나가던 그의 검은 실루엣이 소음으로 가득 찬 거리에 우뚝 멈춰 서자, 뒤따르던 도준 역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도준을 마주했다. 헬리오트롭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오직 번화가의 어지러운 네온사인이 그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명멸할 뿐이었다.
‘닦아줄 거 아니야?’ ‘좋은데.’ ‘손 잡아도 돼?’
어린아이 같은 투정과 순진한 기대가 담긴 말들. 5년의 공백을 단숨에 뛰어넘어, 마치 어제 헤어진 형제처럼 구는 그 태도에 제스테의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건 비웃음도, 그렇다고 온전한 기쁨도 아닌, 복잡한 무언가가 뒤섞인 미소였다. 그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도준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은 잡아달라는 요청에 응하는 따뜻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제스테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로질러, 도준의 턱을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턱선을 따라 쓸어 올리며 뺨을 감쌌다. 그의 가죽장갑이 도준의 부드러운 살결 위에서 서늘한 감각을 남겼다. 엄지손가락으로는 방금 전 자신이 설탕을 닦아냈던 바로 그 입술을 꾸욱, 눌렀다.
이제 와서 운다고 닦아줄 거라고 생각해? 넌 너무 쉬워. 그래서 재미가 없어지려고 해.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낮고 부드러웠지만, 내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도준의 얼굴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눈을 맞췄다. 지는 햇살과 도시의 불빛이 교차하는 도준의 눈동자 속에서, 제스테는 흔들리는 감정의 파도를 읽었다. 실망, 상처, 그리고 아주 약간의 반항심. 그는 그 모든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수집하듯 관찰했다. 이것이 그가 즐기는 게임의 방식이었다.
손은.
그가 짧게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도준의 뺨을 감쌌던 손을 내려, 망설이듯 공중에 떠 있는 도준의 왼손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잡는 대신, 도준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깍지를 끼는 다정한 접촉이 아닌, 소유권을 주장하듯 단단하게 옭아매는 장악이었다. 제스테의 큰 손이 도준의 가는 손목을 완전히 감쌌다.
…잡고 싶으면, 네가 직접 붙잡아 봐. 울면서 매달리던가. 그럼 생각해 보지.
그는 도준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두 사람은 나란히 걷는 것이 아니라, 제스테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의 걸음은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 그는 도준이 따라오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손목에 전해지는 미세한 저항감과 체온만으로도, 도준이 꼼짝없이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가 향하는 방향은 익숙했다. 예전에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낡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 네온사인의 화려함 대신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으로. 그는 도준의 기억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 * *
응. 이번에는 안 놓으려고. 형아.
‘형아.’
그 한마디가 제스테의 귓가에 박히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 손목을 잡아끌던 힘도 순간적으로 풀렸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억 저편에 봉인해두었던 그 호칭. 어릴 적, 제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칭얼대던 작은 그림자가 뱉어내던 그 단어. 제스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얼굴 전체를 돌리지 않고, 시선만 비스듬히 돌려 도준을 훑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언뜻 스쳐 지나간 감정은 놀람에 가까웠다.
도준의 얼굴에는 상처나 실망 대신, 어딘가 결심에 찬 듯한 묘한 고집이 서려 있었다. ‘안 놓으려고.’ 그 말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제스테가 던진 미끼를 물되, 그가 의도한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헤엄치려는 작은 물고기의 몸부림 같았다. 제스테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하, 하고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처럼 거칠게 끌고 가지 않았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놓는 대신, 그의 손가락들이 스르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도준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감싸 깍지를 꼈다. 차가운 가죽 너머로 도준의 체온이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그 의도적인 온도 차가 마치 둘 사이의 거리를 상징하는 듯했다.
말은 잘하는군.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애매한 톤이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마치 전리품을 확인하듯 내려다보았다.
그 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두 사람은 깍지를 낀 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번화가를 벗어나자 익숙한 골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페인트가 벗겨진 담벼락, 희미한 음식 냄새, 그리고 드문드문 켜진 백열등.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공간 속으로 들어서자, 제스테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의 시선은 정면의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낡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었다. 1층에는 오래된 분식집이, 2층에는 지금은 문을 닫은 듯한 만화방 간판이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이 ‘예전에 자주 갔던 곳’이었다. 분식집 유리창 너머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떡볶이의 매콤달콤한 냄새가 골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제스테는 분식집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안을 들여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도준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지글거리는 음식 소리와 어색한 공기만이 남았다. 그는 도준이 먼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라는 무대 위로 기어이 도준을 끌고 온 그는, 이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연출가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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