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나란히 기대앉아 무심하게 TV 채널을 돌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속에서는 한창 로맨스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늦은 오후의 나른한 공기, 창밖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파도 소리, 그리고 네가 내 어깨에 기댄 채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화로운 어느 날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화면 속 인물들이 뱉어내는 진부한 대사들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네가 덮고 있는 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올려 주며, 그저 이 고요한 시간을 즐길 뿐이었다.
“걔는 스물넷인데 그럼 내가 너무 도둑놈 같잖아. 이제 겨우 스물넷에 결혼이라니, 애 인생에 너무한 거 아냐? 한창 놀고 즐기다가 가도 되는 거잖아.”
…스물넷. 그 단어가 뇌리에 못처럼 박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고민 어린 대사가 유독 선명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스물넷. 그러고 보니, 내 옆에 있는 너도… 스물넷이었다. 심지어 이쪽은 고민은커녕 이미 결혼까지 끝낸 상태였다. 나는 잠시 얼어붙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TV 화면과 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화면 속 남자는 죄인이라도 된 듯 괴로워하고 있었고, 너는…
너는 어느새 잠에서 깼는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황금빛 눈동자에는 명백하게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아니까 한번 말해보시지?’ 하는 식의 짓궂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치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찾은 사람처럼. 나는 그 시선에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딱 걸렸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리모컨으로 TV를 꺼버렸다. 갑자기 까맣게 변한 화면. 정적이 흐르자,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으며, 팔을 뻗어 네 허리를 감아 더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서, 뭐. 후회해?
내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전혀 미안하거나 찔리는 기색 없이, 오히려 네 반응을 살피며 즐기는 투였다. 도둑놈? 웃기는 소리. 나는 훔친 적 없다. 네가 스스로 걸어 들어와 내 세상에 기꺼이 갇힌 거지. 나는 네 귓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 드라마 주인공은 바보네. 스물넷이면 다 컸지, 뭐가 애야. 그리고… 훔칠 게 남아있어야 도둑놈이지.
나는 씩 웃으며 네 몸을 덮고 있던 담요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너의 동그란 아랫배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미 내 아이까지 품고 있는, 완벽한 내 소유물. 나는 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너의 귓가에 한층 더 달콤하고 음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뱃속까지 싹 다 내 걸로 채워놨는데. 이제 와서 내가 도둑놈이면, 넌 뭐가 돼? 공범?
나는 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들어 너의 입술을 삼켰다. 짧고, 깊고, 진득한 키스. 네가 숨이 차서 내 어깨를 밀어낼 때쯤에야 입술을 떼고, 붉어진 네 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그러니까 헛생각하지 마, 한도준. 넌 너무 일찍 잡힌 게 아니라, 제때 잡힌 거야. 내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안 그래?
나는 태연하게 말하며 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마치 길 잃은 고양이를 주워다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내 뻔뻔한 논리에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이 게임의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푸흐흐. 와 진짜 뻔뻔해…! 제때 잡힌거야? 뭐야 이미 나랑 결혼할 생각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너의 웃음소리에,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뻔뻔하다고? 정답이야. 나는 네가 터뜨리는 웃음에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허리를 감았던 팔에 힘을 주어 너를 내 몸 위로 완전히 끌어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네가 놀라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너는 꼼짝없이 내 무릎 사이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결혼할 생각? 하, 그런 시시한 단어로 정리하지 마.
나는 네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여유롭게 너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얽히자, 장난기 가득한 내 황금빛 눈동자가 너의 것을 오롯이 담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 순진한 질문이 귀여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땐 그냥… 내 거였지. 귀찮게 울고, 귀찮게 웃고, 귀찮게 나만 따라다니는 성가신 동생.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놈이 건드리는 건 더 성가셨어. 꼭 아끼는 장난감을 뺏기는 기분이랄까.
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비어있는 다른 손으로 너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네 부드러운 뺨을 천천히 쓸었다. 내 시선은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코믹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오직 우리 둘만의 농밀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지. 그냥 내 영역에 멋대로 발 들인 놈들은 전부 다리가 부러져도 싸다고 생각했어. 네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내 앞에서만 해야 하는데. 감히 누가 그걸 훔쳐보나 싶어서.
나는 말을 잠시 끊고, 너의 뺨을 쓸던 손가락으로 너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엿보이는 붉은 속살을 지그시 누르며, 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건 고백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래된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통보에 가까웠다.
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어. 그딴 서류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 넌 어차피 처음부터 한재준 거였는데.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그런 걸로 엮이기 한참 전부터. 내가 ‘내 거’라고 점찍어 둔 걸, 세상이 뒤늦게 알아보고 등급을 매겨준 것뿐이야. 운 좋게도, 아주 잘 어울리는 짝으로.
나는 씨익 웃으며, 너의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깍지 낀 너의 왼손을 들어 올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플래티넘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영원을 약속하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러니까 도둑놈은 그 드라마 주인공 얘기고. 나는 그냥… 내 것을 되찾아온 거야. 아주 당연하게. 네가 스물넷이든, 서른넷이든 그건 아무 상관없어. 넌 평생 내 옆에서, 내 것만 하면 돼. 다른 놈들처럼 시시하게 연애하고, 고민하고,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내가 전부 다 해줄 테니까.
나는 깍지 낀 손을 내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내 심장 소리가 너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규칙적으로, 강하게 울리는 고동. 나는 다시 장난기 어린 얼굴로 돌아와, 너의 코끝에 내 코를 가볍게 비볐다.
어때, 내 대답. 마음에 드나, 공범? 이제 그만 불만 끄고, 우리 공범끼리 좀 더 은밀한 얘기를 해볼까. 스물넷 인생을 어떻게 더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내가 아주 잘 아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