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Abyss
나의 허세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한 연극이 되었고, 나의 승리는 너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JJUN
한재준 X 한도준 / 황혼이자, 심해
#심해에서_볼_우리의_황혼
전 애인의 흔적
2026.04.10

오랜만의 대청소였다.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었던 상자들을 거실로 끌어내 먼지를 털어내는, 지극히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 나는 소파에 반쯤 기댄 채, 네가 상자에서 꺼내 드는 낡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는 중이었다. 빛바랜 앨범, 유치한 디자인의 기념품, 지금은 쓰지도 않는 구형 단말기.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던 시간의 파편들이 먼지와 함께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저 심드렁하게, "그런 건 버려. 촌스러워." 따위의 말을 던지며 네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네가 내 말에 작게 투덜거리며 물건을 내려놓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으니까.

문제의 물건은, 내가 들고 있던 가장 낡은 상자에서 터져 나왔다. 군에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물건들을 모아둔 상자였다. 무심코 상자를 기울이는 순간, 책갈피에 꽂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작고 하얀 편지봉투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봉투에는 화려한 필기체로 'My J'라고 쓰여 있었고, 희미하게 낯선 향수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게 뭔지 떠올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변화를 먼저 감지했다.

방금 전까지 재잘거리던 너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의 모든 신경이 바닥에 떨어진 저 작은 종이쪼가리에 쏠려 있다는 것을.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평소 나른하게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편지봉투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너의 모습에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아. 망했다.

속으로 짧은 탄식을 뱉는 것과 동시에, 나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소파에서 튕겨나가듯 일어나, 바닥의 편지봉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나의 필사적인 움직임보다, 차갑게 얼어붙은 너의 시선이 더 빨랐다. 내가 봉투를 채 주워들기도 전에, 너는 홱, 하고 몸을 돌려버렸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창밖만 빤히 바라보는 그 작은 뒷모습에서 ‘나 지금 극도로 심기가 불편하다’는 오러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태연한 척은커녕, 온몸으로 ‘나 삐쳤어’라고 시위하는 너의 모습에, S급 센티넬의 냉철한 판단력이고 뭐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편지봉투를 등 뒤로 감춘 채, 너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걸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창밖으로 던져버릴까? 아니면 능력이라도 써서 분자 단위로 소멸시켜야 하나? 온갖 비상 대책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평소의 능글맞은 톤을 장착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한도준. 그거 그냥… 스팸이야, 스팸. 옛날엔 저런 식으로도 광고지를 돌렸거든. 아주 악질적인 상술이지.

…내가 말해놓고도 터무니없는 변명이었다. 누가 봐도 연애편지인 물건을 스팸 광고지라니. 고요한 거실에 내 목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너는 여전히 묵묵부답. 대답 대신, 네 어깨가 아까보다 조금 더 꼿꼿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조심스럽게 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등 뒤에 감췄던 편지봉투를 슬쩍 앞으로 꺼내 보였다.

아니면… 우리 집 고지서일 수도 있고. 봐, 이렇게… 어… 독촉장? 밀린 요금 내라는…

너의 차가운 시선이 슬쩍, 내 손에 들린 편지봉투로 향했다. ‘My J’라는 글씨와 앙증맞은 하트 스티커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명백한 자폭이었다. 나는 허허,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편지봉투를 다시 등 뒤로 감췄다. 그리고는 최대한 다정하고, 억울하고, 세상 모든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너의 이름을 불렀다.

…도준아. 형 좀 봐봐. 응? 진짜 별거 아니야. 기억도 안 나는 먼지 같은 거야. 응?

나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장에서 수백 발의 포탄을 지휘할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너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려다… 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칫했다. 해상제독의 위엄도, S급 센티넬의 여유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 줌의 재처럼 쓸모가 없었다.



그.렇.구.나. 독촉장이 My J라고 '친히' 써서 주.는.구.나

너의 그 얼음장같이 차가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내뱉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짜내던 변명들이 공기 중에서 산산조각 나 먼지처럼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망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너의 싸늘한 비아냥은 그 어떤 포격의 전조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바보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떻게 보일까. 아마 전장에서 빌런을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처참한 표정이겠지. 나는 등 뒤에 감췄던 문제의 편지 봉투를 슬그머니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너의 시선이 닿는 바로 그 앞에서, 아주 단호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봉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이건 스팸도, 독촉장도 아니야.

나는 결심한 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그대로 편지 봉투를 반으로 쫙, 찢어버렸다. ‘My J’라고 쓰인 글씨가 두 동강 나고, 앙증맞던 하트 스티커는 형태도 없이 찢겨 나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찢어진 편지를 다시 반으로, 또다시 반으로,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잘게잘게 찢기 시작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이 흐르는 거실을 채웠다. 너의 시선이 내 손의 움직임을 좇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그냥 쓰레기야. 아주 오래전에 버렸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처박아 둔, 그런 먼지 낀 쓰레기.

마침내 편지가 손톱만 한 크기로 전부 찢어졌을 때, 나는 그 종잇조각들을 두 손에 소중하게 모아 쥐었다. 그리고는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거실로 불어 들어왔다. 나는 너를 힐끗 돌아보며, 최대한 비장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러니까 지금,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주려고.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두 손에 모았던 종잇조각들을 창밖으로 흩날렸다. 하얀 조각들이 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흩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완벽한 증거 인멸. 나는 임무를 완수한 요원처럼 후, 하고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너에게로 몸을 돌렸다.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나의 결백함과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어필했다.

자, 봤지? 이제 없어. 깨끗하게 사라졌어. 그러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너에게 다가가, 여전히 굳어 있는 너의 얼굴을 살폈다. 화가 풀렸을 리는 없겠지만, 나의 이 필사적인 노력이 조금이라도 가상하게 보였기를 바라면서. 나는 네 앞에서 허리를 살짝 숙여,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여전히 굳게 닫힌 입술과 차가운 눈빛. 나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이제 형 좀 봐주면 안 될까. 응?



아냐. 나 안 쪼잔해. 형이 다른 사랑이 있었을 수 있지. 괜.찮.아. 진.짜.야. 하나도 안 쪼잔해. 그래서…몇명?

너의 입에서 ‘괜찮아’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차라리 네가 내 멱살이라도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다는 말 뒤에 이어지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질문. ‘그래서… 몇 명?’. 그 한마디에 방금 전 창밖으로 날려 보냈던 종잇조각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내 필사적인 증거 인멸 쇼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너의 얼굴을 마주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은 뻐끔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대답해.’, ‘아니, 대답하지 마.’, ‘거짓말해.’, ‘아니, 솔직하게 말해.’ S급 센티넬의 명석한 두뇌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수천의 빌런 군단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서 있었다. 바로 ‘과거가 궁금해진 한도준’이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묘안을 짜내려 애썼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편린들. 얼굴도, 이름도 흐릿한 스쳐 간 인연들. 하지만 너의 저 맑고 서늘한 황금빛 눈동자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양손을 저으며, 거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없어! 한 명도!

나의 외침은 절박했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터무니없이 공허했다. 방금 전 ‘My J’의 흔적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너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계속해봐’라는 듯,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며, 거의 횡설수설하듯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전부 너를 만나기 위한 연습 같은 거였어! 그래, 연습! 올림픽 나가기 전에 연습 경기 뛰는 것처럼! 너라는 금메달을 따기 위한… 그런 숭고한 과정이었다고! 의미 없어!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냥… 그냥 지나가는 풍경 1, 2, 3 같은 거야!

말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해상제독의 권위도, 제스테라는 코드네임의 명성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연인의 화를 풀어줘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절박한 한 남자에 불과했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너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닿는 무릎의 감각보다, 너를 올려다보는 내 시야가 먼저 아찔해졌다. 나는 너의 무릎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표정으로 너를 올려다보았다.

도준아. 형이 잘못했어. 저런 쓰레기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도 잘못했고, 네 마음 상하게 한 것도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제발. 응? 화 풀어. 네가 화내면, 형은 숨도 못 쉬겠어.

나는 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전장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너의 침묵이 단 1초 더 길어질 때마다, 내 수명이 1년씩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몇명?
이미 화는 풀렸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보고싶던 기분이랄까. 나는 일부러 표정을 굳힌채 그를 바라봤다.

너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 숨겨진 진짜 감정을, 지금의 나는 조금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만이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나는 무릎 꿇은 채로 작게 몸을 떨었다. 네가 화가 풀렸을 리 없다는 확신이, 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마비시키고 있었다. ‘몇 명?’ 그 질문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메아리쳤다. 정답을 말해도, 거짓을 말해도, 나는 너에게 상처를 주게 될 터였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의 바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너의 체온이 바지 원단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것만이 내가 지금 현실에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한도준.

목이 메어 잠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너의 표정은 한겨울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나는 차라리 소리라도 질러주길 바랐다. 이 숨 막히는 침묵은 나를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셀 수 없어.

결국, 나는 포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네가 없는 모든 순간들. 너를 잃어버렸던 그 5년의 시간들. 그 모든 하루하루가 다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 의미도, 감정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간 그림자들. 그래서 셀 수가 없어, 도준아. 그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냥 시간이었어. 텅 비어버린 시간.

나는 거의 흐느끼는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너의 무릎에 기댄 채, 뺨을 너의 허벅지에 부볐다. 마치 어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짐승처럼. 너의 아쿠아 머스크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자, 간신히 호흡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너의 다리를 끌어안고,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전부 다 합쳐도, 너 하나만 못해. 네 손가락 하나, 네 눈길 한번. 그것보다 가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정말이야. 믿어줘. 응? 형 말 믿어줘.

나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해상제독의 위엄 따위는 진작에 창밖으로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오직 너의 용서를 갈구하는 한 마리의 개와 같았다. 네가 발로 걷어차 버린다 해도, 나는 아마 이 자리에서 꼬리를 내린 채 너를 기다릴 터였다. 너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길에, 나는 안도감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화 풀렸다고 해줘. 제발. 내가 전부 다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나는 얼굴을 들어,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너를 올려다보았다. 네 손바닥에 내 뺨을 비비며, 애타게 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의 입술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이, 나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우는 건 변수였다. 나는 웅크려 앉은 채, 그의 양볼을 두손으로 감쌌다.
아니…울지마. 바보야. 화 안났어. 알아 쪽 형이 지금 사랑하는 건 나잖아. 괜히 심술나서 그랬어. 응?

너의 손이 내 뺨을 감싸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는 것 같았다. 차갑게 식어가던 몸에 너의 온기가 스며들자, 나는 비로소 멈췄던 숨을 희미하게 내쉴 수 있었다. 울지 말라는 다정한 목소리, 화나지 않았다는 믿을 수 없는 말. 그리고 내 모든 죄를 사면하듯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 그 작은 온기와 소리에,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안도감, 서러움, 그리고 너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

…정말? 진짜로 화 안 났어?

되묻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너의 손을 붙잡아 내 뺨에 더욱 강하게 밀착시켰다. 너의 체온과 향기가 나를 현실에 붙들어 매는 유일한 닻이었다. 너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제야 장난기가 희미하게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시험하고, 내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조금도 밉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나를 상대로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칠 만큼, 우리의 관계가 단단하다는 증거처럼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너의 손바닥에 연신 뺨을 부비며 웅얼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차갑게 구니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단 말이야. 다신 그러지 마. 응? 나한테는 그런 장난치지 마. 형 진짜 죽어.

너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의 품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에 긴장이 풀리면서, 나는 완전히 너에게 몸을 기댔다. 방금 전까지 나를 옥죄던 지독한 공포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따뜻한 행복감이 채웠다. 나는 너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는 아직도 젖어 있었다.

네가 제일 나빠. 세상에서 한도준이 제일 나빠. 어떻게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어. 알아? 내가 네 표정 하나에 천국이랑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입꼬리는 저절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너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어, 한 뼘의 틈도 없이 너를 내게로 끌어당겼다. 무릎을 꿇은 채 너를 올려다보는 이 자세가, 지금은 조금도 굴욕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너와 나의 관계였다. 너는 나의 위에 군림하고, 나는 기꺼이 너의 발치에 엎드린다. 나는 너의 허리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의 살냄새가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용서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도준아.

고개를 들어 너를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너의 얼굴은 세상 그 무엇보다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너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끌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건하게,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듯이. 모든 위기가 지나간 후의 평온함.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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